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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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찢어진 청바지

2000-09-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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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 권정희 편집위원

지난달 서울에 갔을 때 생활주변 이슈 중 가장 큰 관심을 모으던 것은 머리염색이었다. 10대를 자녀로 둔 주부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아이들의 머리염색이 자주 화제로 올랐다. 방학이 되어 학교교칙에서 한달여나마 풀려나게 되자 중고교생들이 너도나도 머리염색을 해서 미장원이 학생손님들로 붐볐다고 했다.

염색이 화제로 오르기 전부터도 서울의 거리나 지하철에서 가장 눈을 끌던 것은 젊은이들의

색깔 머리였다. 눈을 끌었다기 보다는 눈을 돌리게 했다는 표현이 더 옳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쳐다보기에는 색상이 너무 현란해서 짧은 순간이나마 쇼크를 진정해야 했다. 오렌지색, 보라색, 초록색, 노란색… 학원골목 같이 젊은이들이 많은 거리에서는 그야말로 총천연색 머리카락들이 휘날렸다. 버스정류장에서 승객들이 올라탈때 빨간 머리털이 불쑥 솟아오르면 타고 있던 노인들은 깜짝깜짝 놀란다고 했다.


머리염색은 사석에서 뿐아니라 래디오토크쇼에서도 이슈로 등장해 팽팽한 찬반토론이 전개되었다. 찬성하는 측 주장은 “아이들의 개성 표출이다. 자유스럽게 자신을 표현하도록 허용해야 창의력도 생기고 자발성도 생긴다”는 것이고, 반대측 주장은 “개성이 아니라 무분별한 연예인 모방심리다. 미성년자들에게는 사회의 규제나 규범을 배우는 훈련도 필요하다”는 것이 골자였다.

미국에서 간 내게 의외였던 것은 아무도 ‘빨간머리, 노란머리’ 자체를 문제로 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딸이나 아들이 연두색, 주홍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왔을 때 각 가정에서 어떤 반응들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표면적인 여론은 “요즘 젊은이들 다 그런데…”정도였다. 논쟁의 도마위에 오른 것은 중고교생의 머리염색을 허락할 것인가 말것인가이고, 그나마 학기중 이야기이지 방학동안의 염색은 대개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방학중에도 까만머리 그대로인 아이들은 친구들로부터‘고집불통’이라는 빈축을 듣는다고 했다.

TV를 켜면 가수나 탤런트들, 밖에 나가면 또래 젊은이들 모두 머리가 울긋불긋한데 색깔튀는 염색을 좀 했다고 그것을 ‘개성’이라고 할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단순히 유행일 뿐이고 설익은 치기도 보였다. 그렇기는 해도 한국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한 모습과 자의반 타의반 그런 젊은이들을 받아들여주는 부모세대의 헐거워진 품은 인상적이었다.

한국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오면 의식구조가 김포공항을 떠나는 그 시점에서 굳어진다고 한다. 그 시대의 말과 생각이 박제되어서 “모름지기 코리안은 이래야한다”는 생활의 지표가 된다는 것이다. 60년대 유학와 근 40년 미국에서 산 사람들중 정말 고지식한 사람을 가끔 보는데 그것은 60년대 한국식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앳된 얼굴에 머리색깔만 요란한 한국의 10대들을 보다가 미국에 돌아와 파란 눈 노란머리의 나라에서 까만머리 그대로 당당한 우리의 자녀들을 보니 믿음직스러웠다. 물론 까만머리가 본인의 선택일 경우에 한한다. 20년전, 30년전 한국 사고방식을 가진 보수적 부모와의 마찰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아들이 10대 중반인 어느 1.5세 아빠가 이런 말을 했다.

“12살 되면서 아이가 말을 안듣더군요. 처음엔 화가 났지만 아이가 저나름대로의 의견을 가질 만큼 성장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흐뭇했습니다”

아이들은 조각을 위해 반죽된 진흙에 비유될 수 있다. 성인이 되어 한 모양으로 굳어지기 전까지 수없이 바뀌고 다듬어진다. 청소년기는 조각의 가장 중요한 골격이 잡히면서 왕성하게 다듬어지는 시기, 정체성을 찾는 시기이다. 부모들의 60년대, 70년대 사고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시대와 자연스럽지 못한 편협성으로 아이라는 조각의 모양을 미리 고정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절 연휴가 끝나면 각급 학교들이 모두 개학을 한다. 새학년 첫날 어떤 옷을 입을까, 어떤 머리를 할까 아이들은 심각하다. 튀고 싶은 마음에 머리염색을 한다고 해도, 반듯한 새옷 두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는다고 해도 그냥 내버려둬 보자. 시행착오 없는 삶처럼 무미건조한 삶도 없다. 아이가 정해진 틀에 너무 일찍 갇히면 가능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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