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남북교류’ 흥분접고 냉정 되찾을때

2000-08-3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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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례 좌담

▶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과 반미감정

8월 가장 큰 관심은 남북화해였다. 분단 50년만에 남북한의 이산가족이 서울과 평양에서 만남의 소원을 풀었고, 장관급 회담등 실무접촉이 회를 거듭하면서 남북관계가 급진전을 보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후 남북교류는 급류를 타고 있지만 그와 관련, 한국내에서는 정체성의 혼란, 도가 지나친 반미감정등 문제가 없지 않다. 본보 논설·편집위원 방담을 통해 한국의 이산가족상봉, 반미감정을 짚어보고 이에 대한 해외의 시각, 문제점등을 살펴본다.

참석자
▲옥세철 논설위원 ▲박덕만 편집위원 ▲민경훈 편집위원 ▲권정희 편집위원

정리 - 권정희 편집위원


▲권정희 편집위원 - 8.15 남북이산가족 상봉으로 한국이 들떠있을 때 마침 서울에 있었습니다. 모두들 하루종일 TV 앞에 붙어서 이산가족들과 같이 울고 웃더군요. 이번에 가족을 만난 사람들은 만난대로, 아직 못만난 사람은 못만난대로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연일 보도되었습니다.

▲옥세철 논설위원 - 이산가족의 참담한 삶에는 세계가 함께 울었습니다. 한 미국의 베테란 기자는 수많은 목숨이 죽어나가는 전쟁등 숱한 취재현장에서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는데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취재하면서 함께 울었다고 고백했더군요.

▲민경훈 편집위원-남북 이산가족이 만났다고 한국이 흥분에 휩싸여 있는 것에 비해 미국에서는 상당히 냉담한 시각도 있습니다. 엊그제 워싱턴포스트는 사설로 이산가족이 만난 것은 감동적인 일이지만 이번 상봉은 북한정권의 잔인성을 보여준 사례라고 논평했습니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고위관리등 상류층인데다가 모든 만남이 호텔 연회장에서 철저한 감시 속에서 이뤄졌다는 거죠. 뿐만 아니라 귀순자가 나올까봐 북한측 방문단 전원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한국측 방문단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며 평양에 간 한국인들은 인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옥-이번엔 처음이니까 북한측 주장을 많이 수용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산가족상봉이 다음부터는 포맷을 달리해야 약발이 먹힐 겁니다. 호텔에서 만나고 당국자가 나와서 지루한 연설이나 하는 스타일은 더 이상 안통할 겁니다. 이벤트성 이산가족 상봉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박덕만 편집위원-남북화해 분위기에 대한 미주한인사회의 시각은 엇갈리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만만치 않습니다. 얼마전 LA한인회가 친북노선의 단체들과 공동으로 개최한 8.15기념행사에 이북도민연합회, 재향군인회, 6.25참전동지회같은 우익단체들이 참여하지 않은 것도 그같은 맥락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태극기가 게양되지 않는다더라’ ‘인공기가 게양된다더라’등의 소문을 내세워 불참이유로 삼았지만 내면적으로는 지금의 화해무드에 휩쓸리기 싫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권- 한국에서도‘보수의 대반격’이 상당히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이 끝나고 나면 보수세력의 시대가 다시 열린다며 남북교류 분위기 속에서 몸을 사리는 사람들도 꽤 있어 보였습니다.


▲박- 근본적으로 북한을, 김정일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일 것입니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화해하자며 손을 내밀지만 조금 형편이 피고나면 다시 남침의 발톱을 내밀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소 김대중대통령을 싫어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김대통령의 사상문제까지 거론해가며 북의 전략에 말려들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봤습니다.

▲옥-북한을 어떻게든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려는 게 한국정부 입장이니만큼 그동안 한국정부가 보여 온 입장은 십분 이해가 됩니다. 북한의 김정일체제는 싫든 좋든 협상대상이므로 가급적 자극을 하지않고, 또 때로는 비위도 맞추어야 하는 경우도 있겠죠. 그런데 너무 획일적인 접근방식에만 의존한 것 같습니다.

▲민-오늘 LA타임스도 북한과의 관계가 깨질까봐 쉬쉬하는 한국의 분위기를 비판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연례 군사훈련 규모를 대폭 줄였으며 한국의 언론들도 김정일에 대한 비판은 일체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옥-언론의 북한보도 방향을 놓고 정부와 일부 언론간에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북한문제를 너무 획일적 방식으로 접근하려는데서 나타난 일입니다. 북한체제에 상당히 유화적 입장의 보도도 나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의 인권문제도 거론되어야 합니다. 각기 제목소리를 내는 게 자유민주주의인데 정부입장만 지나치게 ‘세일’ 했어요. 이게 잘못된 겁니다. 일부에서는 대북강경론도 개진되어야 오히려 대북한 협상에 임하는 정부에 더 힘을 불어넣어 준다고 봅니다.

▲민-한국 언론이 통 관심을 보이지 않는 바람에 450여명에 달하는 남북자 가족들 스토리는 오히려 해외언론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실정입니다. LA타임스는 아버지가 납북된 최우영씨 말을 인용, “한국정부가 이 문제를 뜨거운 감자로 취급하고 있으며 일반 시민들도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해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타임스는 한국 언론들이 군사정부 시절부터 자체검열에 길들여졌다며 정부를 거슬리는 기사는 알아서 싣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권- 요즘 한국보도를 보면 헷갈릴 때가 있어요. 북송 앞둔 비전향 장기수들을 여기저기서 환송하면서 ‘애국지사’라고 추켜세웠다는 데 어느 나라 이야기인가 싶더군요.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모두 빨치산에 간첩 아니면 인민군들입니다. 남한체재 전복이 목적이던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이 먼 친척만 돼도 수사기관의 감시를 받던 게 엊그제인데…너무 극에서 극이에요.

▲박-그야말로 과거의 적이 동지가 되고 과거의 동지는 적으로 바뀌는 상황이군요.

▲권-주한미군들이 느끼는 심정이 꼭 그럴 것 같습니다. 반미감정이 심각해요. 동대문 시장에 샤핑갔던 미국여성이 이유없이 구타를 당하는 가 하면 미군들도 길에서 야유를 당하거나 폭행을 당하는 일이 심심찮다고 합니다.

▲옥-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반미주의는 일종의 쇼크 후유증으로 생각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되짚어 보아야 할 문제는 ‘김정일 쇼크’로 생각됩니다. 머리에 뿔이 달린 괴물쯤으로 생각되었던 김정일이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온데서 일종의 쇼크현상이 발생했죠. 쇼크는 "알고 보니 그게 아니잖아…"식의 반향을 불러오고 일종의 긴장감 해이랄까, 이런 분위기에서 진보세력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반미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한국의 학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는 있었습니다. ‘우리의 감격’에 너무 정신이 팔려서‘바깥의 흐름’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남북문제 해결에는 주변 강대국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 만큼 주변을 냉정히 살피는 신중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민-미국정계가 한반도를 보는 시각도 곱지만은 않습니다. 클린턴 행정부는 겉으로는 남북관계 개선을 지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급격한 변화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고 공화당쪽 시각은 더 따갑습니다. 얼마 전 만난 한 공화당 관계자는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측 장난에 놀아나고 있다는 게 공화당측 생각이라며 그동안 미국이 북한에 갖다준 수억달러가 김정일 정권 연장에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지만 한반도 평화에는 무익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받을 건 다 받고 핵무기나 미사일 개발을 포기한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이죠. 이번 대선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 대북 정책도 강경으로 선회할 것이 분명할 것 같습니다.

▲박- 미국의 한국문제 전문가들이 보는 시각은 두가지로 갈리고 있지만 그래도 이번기회를 잘 이용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워싱턴 허드슨연구소 연구원인 로버트 듀재릭 같은 이는 한반도 통일후에도 동북아시아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주한미군이 계속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얼마전 김정일위원장이 방북 한국 언론사사장단에게 주한미군 주둔을 반대하지 않겠다던 발언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듀재릭은 김정일이 미국을 가까이 하고 오히려 전통맹방이던 중국이나 러시아를 경계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 봤습니다.

▲옥-남북 정상회담이 열린지 두달이 지났으니 쇼크에서 벗어나 냉철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해서 김정일의 행태분석이랄까 이런게 필요한 것 같아요. 서울서 온 분들의 이야기인데 김정일은 노인 다루는데 명수라는 겁니다. 계모 김성애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때 김정일이 정치일선에 등장했는데 이때 그는 혁명 1세대로 불리는 노 정치국원들에게 매달린 덕분에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불리할 때는 납짝 업드려 있으면서 한사람, 두사람 포섭해 결국은 권력을 잡았다는 이야기인데, 사실같아요. 그렇다면 김정일은 상당히 무서운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겁니다. 현대의 정주영 명예회장이나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노인 다루기 명수로서의 솜씨가 발휘됐을 것이란 말이 무성합니다. 이 말의 뜻은 김정일은 치밀한 계산 끝에 행동 하나 하나를 하는 사람이고 이런 면에서 한국서 급격히 확산된 반미주의도 치밀한 각본이 가져온 효과로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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