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중국 사람들은 납을 먹는가

2000-08-2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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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식<전 한국국방부 정훈국장>

8월29일은 우연히도 한국이나 중국이나 역사상 국치일로 남아있다. 한국은 1910년 일제에 의해서 합방되었고, 중국은 1842년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패전해서 치욕적인 남경조약에 조인해야 했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은 중국이 한국에 수출하는 수산물속에 사람이 먹을 수 없고 암을 유발하는 물질들을 넣어서 보내고 있다는 경악스러운 뉴스를 며칠 접하고 있다. 꽃게 속에는 납덩이를, 복어 속에는 쇳덩이를, 홍어 속에는 돌을 넣어 무게를 늘리고 각종 농산물에는 독성이 강한 방부제나 농약을 마구잡이로 뿌려 장기간 썩지 않게 하여 한국에만 보내고 있다. 만일 이것들을 미국이나 일본이나 러시아에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우리도 중국이 한국에 문호를 개방했을 때 한때나마 몰지각한 사람들이 돈 좀 있다고 오만방자하게 굴고 사기행각도 했었다. 그러나 이내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자성을 하고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 뿐만아니라 정부까지도 나서서 거의 보상을 하고 범법자를 색출 엄벌에 처한바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세상은 초 스피드로 변하여 글로벌 시대 즉 지구촌 시대로 돌입한지 꽤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대국과 소국, 중앙국과 주변국 관계로 생각하고 오랑캐 정도로 취급하는 중화사상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시각으로 보는지 답답하고 한심한 생각이 든다. 과거 한때 중국을 보고 종이 호랑이라고 불렀던 것도 여기에 기인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시대가 바뀔 때마다 과거에 오늘의 입장을 비춰보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들은 이러한 격언을 염두에 두고 서양세력과 동양세력이 충돌한 첫번째 대사건인 아편전쟁을 살펴보았으면 좋겠다.

당시 영국은 인도로부터 막대한 량의 아편을 수입해다가 중국에 팔아 넘겼다. 이에 대하여 중국(당시 청나라)의 황제가 심려한 것은 첫째로 아편의 흡음이 관청과 군대에 극성스럽게 퍼져 부패와 타락을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것, 둘째로 농민들이 가뜩이나 부족한 농경지를 수입이 좋은 양귀비재배로 돌려버리고 있다는 것, 셋째로 당시 화폐기준이 은이었는데 영국의 아편 밀매로 엄청난 은이 외국으로 방출되어 국가의 재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성격이 매우 단호하고 청렴한 걸물 임칙서를 군사, 행정의 전권을 주어서 아편밀수의 본거지인 광동으로 급파, 영국 상선에서 아편을 압수해 소각하게 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중국은 패하고 7개항목의 남경조약을 조인하게 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군사 배상금 및 아편배상금을 지불할것, 홍콩을 영구히 영국에 할양할 것, 광동, 복주등 5개항을 열 것등이다. 중국이 아편에 대한 책임을 묻기는커녕 거꾸로 배상금을 물어주고 치외법권을 인정하며 향후 밀수를 해도 제재할 수 없게 되었다.

적반하장 격으로 치욕을 당한 중국이 이 사건을 과거라는 거울에 진지하게 비춰보고 농수산물을 한국에 수출하는 일부 악덕 자국민 상인들에게 단호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한국인의 한사람으로서 기대한다. 우리는 세계인구의 5분의 1내지 4분의 1이 되는 중국이 크게 발전하며 좋은 이웃이 되기를 원한다.

다른 한편 국내적으로 군사정권하에서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저항했던 민주열사·의사는 거의 보상받고 정치가로 관료로 등장하였다고 하는데 다 어디로 갔는가. 그 젊음 그 패기 우리를 얕보는 자들에게 쏟아 부을 수는 없는지? 조선시대 세조의 신하 신숙주가 남긴 명언을 상기시키며 끝을 맺는다.
조유직신적국외지(朝有直臣敵國畏之)라 - 나라에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면 적국이 겁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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