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쟁의 진실

2000-08-2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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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수첩

▶ 김종하 기자

2차대전 당시 아시아에서 저질러진 일본의 전쟁범죄 책임을 따지는 일이 최근 이곳 미국에서 이슈화되고 있다. 연방의회가 일제징용 피해자의 배상을 위한 입법을 추진중이고 하원에는 일본의 전쟁범죄상 공개를 위한 합동조사단 활동 강화 법안이 제출됐다. 며칠 전에는 미국내 중국계 징용피해자들이 중국 본토인들과 함께 미국 법원에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피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할머니 6명을 포함한 ‘위안부’ 출신 10명이 다음달 미 의사당에서 인권상을 수상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전쟁범죄 진상 밝히기에 세계적 관심이 집중된다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맞춰 LA를 방문한 한 젊은 일본 국회의원의 행보가 눈길을 끈다. 그의 이름은 다나카 코(田中 甲). 올해 42세다. 일본의 하원격인 중의원 의원인 그는 짧은 미국 체류기간에 다이앤 파인스타인 연방상원의원을 만나고 아시아계 언론들을 찾아다녔다. 자신을 포함안 110명 의원들의 주도로 지난해 상정돼 현재 일본 의회에 계류중인 전쟁범죄 공개법안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현재 일본에는 수천만장에 달하는 전쟁관련 극비문서가 존재한다고 한다. 이 법안은 이같은 전쟁 관련 비밀문서 공개 및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 징병·징용 및 ‘종군위안부’, 난징대학살 및 생체실험 등 당시 일본 만행의 진상을 밝히자는 것이다.

소위 전후세대이면서도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다나카 의원이 이렇게 나서는 것은 "비밀문서 공개야말로 일본 전쟁책임 규명의 첫 걸음"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법안 통과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의회 분위기상 어렵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는 "일본인들이 스스로 역사적 진실을 아는 게 중요하지 않겠는가"하고 반문했다.


우경화 바람이 거세고 정치인들의 군국주의적 망언이 일상화된 일본에서 스스로 전쟁범죄 관련 사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인정하는 것만이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젊은 일본 국회의원의 ‘역사 바로 세우기’ 인식은 피해 당사자 국가이면서도 ‘위안부’ 문제 등에 소극적인 한국 정부의 태도와 대비돼 더욱 신선했다.

종전후 50여년이 더 지난 지금 징용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하고 나선 이유, 백발의 할머니들이 수치심을 무릅쓰고 ‘위안부’의 참상을 폭로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이 일본에 당한 참혹했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길은 벌써 반세기도 넘어버린 세월의 약이 아니라 바로 역사적 진실의 규명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들의 노력에 귀 기울이고 지원을 보내야 할 까닭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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