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챔피언의 경기

2000-08-2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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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 칼럼

▶ 박덕만 (편집위원)

챔피언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중세 때다. 당시 서유럽의 주인이었던 앵글로-노르만족은 바이킹의 후예답게 문제가 생기면 당사자들간에 결투로 재판을 했다. 신이 반드시 정의의 편을 들어준다고 믿었기에 결투에서 이긴 사람은 옳고, 패한 사람은 그른 것으로 취급됐다. 초기에는 결투에서 지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화형이나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다.

부녀자나 어린이, 노인, 불구자 그리고 성직자는 결투에서 대신 싸워줄 사람을 지명할 수가 있었다. 이처럼 힘이 약한 사람을 대신해서 결투에 임하는 사람을 ‘챔피언’이라고 불렀다. 챔피언으로 지명 받은 사람은 남을 대신해서 싸우다가 잘못되면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는 수도 있었지만 결코 꽁무니를 빼는 일은 없었다. 비겁자 소리를 듣느니 죽음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믿고 챔피언으로 지명해 준 사람을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다.

오늘날에는 챔피언의 의미가 ‘각종 운동경기에서 우승을 한 사람’으로 달라졌다. 그러나 "믿고 지켜보는 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한다"는 역할에 있어서는 오늘의 챔피언과 중세의 챔피언이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점에서 20일 끝난 PGA 챔피언십 골프대회에서 우승한 타이거 우즈는 ‘진정한 챔피언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었다.


이날 챔피언의 운명을 갈랐던 것은 바로 4라운드 15번홀이었다. 14번홀까지 17언더파로 16언더파의 타이거에게 한타 앞서 있던 밥 메이의 어프로치샷이 홀컵 3피트 거리에 붙었다. 반면 우즈는 2번째 샷이 그린을 오버했고 다시 3번째 샷도 실수, 홀컵에서 15피트나 거리가 떨어졌다. 누가 보아도 타이거는 보기, 메이는 버디가 확실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불과 3홀을 남겨놓고 3타차로 벌어지게 됐으니 ‘한시즌 메이저 3개 대회 동시석권’이라는 47년만의 대기록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상황에서 챔피언의 진면목이 나왔다. 여러 각도에서 신중하게 라이를 살핀 우즈가 불가능해 보였던 펏을 성공시킨 것이다. 상황은 역전됐다. 우즈의 파펏 성공에 메이가 오히려 당황한 듯 골프용어로 ‘김미’라고 할만한 쉬운 버디펏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메이가 한타 앞서 있기는 했지만 다음홀부터 티샷마저 흔들렸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난 우즈는 17번홀에서 티샷이 빗나간 메이가 2온2펏으로 파에 그치는 사이 어프로치를 4피트에 붙여 버디를 잡는데 성공, 메이와 타이를 이뤘다.

메이도 그대로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파5인 마지막 18번홀에서 티샷 난조로 불리한 상황에 처했으나 그린엣지에서의 10피트 버디펏을 성공시켜 기사회생했다. 이제는 우즈가 몰렸다. 5피트 버디펏을 반드시 성공시켜야하는 부담감을 안게 됐다. 쉬운 펏은 아니었고 긴장된 상황인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나 역시 챔피언은 ‘반드시 넣어야할 펏은 넣고야 마는 법.’ 공은 홀컵 가운데로 정확하게 빨려 들어갔고 두사람은 3홀 연장전에 들어갔다.

연장에 들어간 두사람은 계속된 혈투에 극도로 지친 듯 이기기보다는 살아남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으나 연장 첫홀인 16번홀에서 25피트 롱버디펏을 성공시킨 우즈가 끝내 승리를 지켰다. 메이도 비록 생애 첫 PGA대회 우승은 놓쳤지만 연장 마지막홀까지 자신의 최선을 다했다. ‘진정한 챔피언은 메이’라는 외침이 갤러리 속에서 나왔다. 무슨 운동이든 져서 좋은 경기는 있을 수 없겠지만 이처럼 사력을 다해 경기를 펼치고 나면 승자는 물론이요 패자도 아름다운 법이다. 시상식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즈와 메이 두 사람 모두 "후회 없는 좋은 승부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승리의 여신이 결국 타이거 우즈의 손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이날 대회는 혼신의 힘을 다한 ‘챔피언의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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