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말끝마다 “위대하신...”

2000-08-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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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평양방문단이 서울을 떠나기전 소양교육을 받아서 그랬는지 85년 상봉 때보다 해프닝이 적었다.

크리스찬이 몇십년만에 혈육을 만나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으로...”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북한사람들은 “하나님 덕분에...”“주님 은총으로...” 소리를 들으면 짜증을 내면서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모두 위대하신 수령 덕분이야”라고 말한다. 이같은 해프닝이 85년 상봉 때는 꽤 많았다.

남쪽측이 이번에 평양으로 가는 이산가족들에게 ‘북한알기’ 소양교육에서 제일 강조한 것은 김정일을 절대 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호칭도 ‘김정일 장군’ 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부르고 김위원장의 얼굴이 실린 신문을 방바닥에 버리거나 찢으면 시끄러워진다는 것도 교육시켰다.


당국이 평양방문단에게 강조한 것은 “체제논쟁을 하지 말라”“비교하지 말라”“과시하지 말라”“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등이었다. 북한에서도 서울방문단에게 ‘남한알기’ 소양교육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북한사람들은 말끝마다 ‘김정일 장군’이 튀어 나왔다. 예를 들어 방문 첫날 김포공항에 들어선 북한측의 류미영단장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위대하신 김정일 동지가 결단을 내려 이번에 남북이산가족이 역사적인...” 운운했다. 이밖에 워커힐에서 있은 가족끼리의 모임에서도 북한인들은 “김정일 장군 덕분에 내가 이렇게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남쪽 사람들은 전과는 달리 귀에 약간 거슬려도 그냥 받아 들이는 기색들이었다.

평양을 방문한 최성록씨(79)는 딸 영자씨(53)가 “50년만에 만난 것은 모두 장군님 덕분입니다”라고 하자 “나는 남쪽이니까 김대중 대통령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남에서 온 아버지 이몽섭씨(75)를 만난 북의 딸 도순씨(55)는 북한 TV 카메라가 돌아가자 갑자기 “우리는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으로 살아 왔습니다. 아버님이 장군품으로 돌아 왔으면 좋겠습니다. 지나간 과오는 묻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 아버지를 입장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평양에 간 남한 가족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북한은 먹고 살기가 어렵다며?”라는 말이 튀어 나왔는데 이 물음에는 의례 “위대하신 동지(김정일) 덕분으로 우리는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남북의 문화 차이를 실감케 한다. 잘 나가다가도 체제에 관한 언급이 나오면 전혀 딴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북한인들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또 서울에 온 북한인이나 평양에 있는 북한 가족이나 말끝마다 “통일이 멀지 않다”고 했는데 이들이 말하는 ‘통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새겨 들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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