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현대는 모두 어디로 갔지?

2000-07-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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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인이 본 한국 한국인

▶ 크리스 포오먼(샌프란시스코주립대 교수)

차를 바꿔 볼까 하고 아내와 함께 샤핑에 나섰다. 아내는 벤츠, BMW, 렉서스 하며 비싼 외제 차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나는 슬그머니 넉넉지 않는 호주머니 사정을 생각을 하며 아내에게 "당신이 한국사람이니까 현대 차를 삽시다" 하였다. 아내는 콧등에 잔주름을 잡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당신 농담하는 거지요?" 하고 물었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우리 한제 자동차 삽시다. 싸고 스타일도 좋은 것 같은데" 나는 아내를 설득시키려고 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당신도 한제이잖아" 하였다. 아내는 더 이상 내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입을 다물더니 차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었다.

샌호제에 있는 한인교회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주차장에 동시에 도착하였던 자동차 3대에서 아내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내리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똑같은 골드색깔 렉서스 차의 주인들이었다. 주차장에 서 있는 100여대가 넘는 차들을 유심히 살피며 교회당으로 걸어갔다. 혼다, 도요타, 렉서스, 닛산등 대부분이 일제 차였다. 벤츠, BMW와 같은 유럽차도 있었고, 미제 차도 드문드문 눈에 뜨였다. 그런데 현대나 대우에서 만든 차는 하나도 없었다.

70년대에 한국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 배운 한국말 중 한마디가 ‘한제’라는 말이다. ‘한국에서 만든 물건’을 가리켜서 하는 말인데 ‘한제’의 반대말은 ‘미제’라고 하였다. 영어를 못하는 상인들도 ‘Made in USA’는 알았다. ‘한제’와 ‘미제’라는 말과 더불어 GI 말로 시장에서 사용되는 ‘미제 넘버 원’ ‘한제 넘버 텐’이라는 말도 그 때 배웠다.


하루는 손톱깎이를 사려고 가게에 갔는데 가게 주인이 500원짜리 미제 손톱깎이를 보여주었다. 내 생각에 너무 비싼 것 같아서 진열장에 있는 100원 짜리 손톱깎이를 가리켰다. 가게 주인 아저씨가 브로큰 영어로 “한 제 넘버 텐. 나빠요" 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좋지 않다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가게 아저씨가 비싼 것을 팔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100원짜리 한제 손톱깎이를 샀다. 500원짜리와 똑같이 생긴 손톱깎이를 싸게 샀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나는 한국 친구에게 자랑삼아 보여 주었다. 한국 친구는 손톱깎이를 내 손에서 빼앗아 자세히 체크하더니 “한제인데요. 나빠요" 하였다.

가게 아저씨와 똑같은 말을 하는 친구를 보며 “한국 사람들이 왜 이럴까?" 참 이상하다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누구든지 손톱깎이를 만들 수 있지 않는가. 미제건 한제건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은데, 왜 한제가 나쁘다고 하는지 어리둥절하였다. 더구나 자기 나라 물건을 외국인에게 나쁘다고 하는데 더욱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다음날 나는 새로 사온 손톱깎이로 손톱을 깎는데 갑자기 손톱깎이 윗부분이 두 조각으로 부러져 버렸다. 쇼크였다.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고장이 나버린 한제 손톱깎이를 보면서 친구와 가게 아저씨가 “한제" 하면서 고개를 저었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고장난 손톱깎이를 버리고, 다른 가게에 가서 미제 손톱깎이를 샀던 기억이 있다.

한제 물건에 실망한 그 후부터 실용품을 사기 위해 남대문에 있는 블랙마켓을 찾아가곤 하였다. 미제 면도기, 미제 샴푸, 심지어는 속내의까지 미제를 샀다. 아내의 여동생들에게 미제 스타킹을 선물하여 인기를 얻었던 기억도 있다.

세상이 달라졌다. 한국에서 만든 좋은 전자제품을 미국 사람들도 많이 쓰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 시절에 한국에서 살았던 한인 1세들의 기억에는 아직도 ‘한제는 넘버 텐’이라는 생각이 잠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인들이 모인 행사 주차장에서 그렇게 느꼈다. 한인 1세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미국에 사는 한인 2세들은 용기를 가지고 현대 또는 대우 차를 사서 타고 다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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