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틈만 보이면 소송

2000-07-2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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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터일기

▶ 정균희<정신과 의사>

30대 중반의 여인이 인슐린 과용으로 자살기도를 했다가 실패하여 응급실에 실려와 회생되고서, 억지를 부린 사건이 있었다. 자살기도 후의 상태는 위독한 상황이라서 약간의 오차가 있었어도 이 여인은 죽었을 것인데 내과 의사들과 정신과 의사들이 잘 협력하여 살려냈다. 그러고 나니 이제는 자신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들을 상대로 고소를 한 것이었다. 환자는 그렇다고 해도 거기에 맞장구를 치면서 고소를 받아주는 사회제도에도 어쩌면 책임이 있을 수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 여인은 반 혼수상태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혈관주사도 꽂혀 있고 병원 침대에서 발버둥을 치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다칠 수도 있고 하여 침대 네 귀퉁이에 사지를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일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이 환자는 퇴원하자마자 양 손목의 멍자국을 사진 찍어놓고 사진까지 첨부하며 용의주도하게 고소를 해왔다. 환자의 주장인 즉은 필요 없는 사지결박으로 자신의 팔목에 멍이 들게 하고 고통을 주었고 환자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것이었다.


병원 변호사와의 첫 만남에서 나는 강조했다. 내 시간이 좀 많이 들더라도 이런 경우 없는 고소를 하는 버릇은 고쳐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과 응급실과 정신과 응급실을 오가며 치료받고, 정신병동에 3일간 입원했으니 차트는 책 한권이 족히 되었다. 이 차트를 철저히 읽고 방어 준비를 했다. 멀쩡히 잘 지내는 사람을 병원에 강제로 끌고 온 것도 아니고, 더구나 의사와 간호사 말대로 치료 잘 받는 사람을 묶어 놓은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기도한 자살이었고, 그 결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었다.

조그마한 오차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을 건져낸 것은 의사로서는 상당히 자랑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재판 전에 하는 선서증언에서 반나절이나 소모하며 답변을 했는데, 나뿐 아니라 수년전 이 환자를 돌보았던 수련의도 불려오고 간호사도, 내과 의사도 줄줄이 불려서 증언을 했다. 증언이 다 끝나고 나오면서 변호사에게 다시 한번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절대 합의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가서 다시는 이런 넌센스가 생기지 않도록 본을 보여야 한다고….

한 두어 달이 지나서야 변호사에게 편지가 왔는데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을 비롯한 많은 병원 의사들이 잘 협조해서 케이스를 성공적으로 변호할 수 있게 됨을 감사한다.”그리고 이 사건은 병원서 5,000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함으로써 고소취하로 해결했다고 덧붙였다. 끝까지 밀고 가서 병원과 의사들이 과실이 없다는 결론을 얻어내려면 정식 재판과정까지 가야하고 그러자면 몇 달이 더 걸려 몇 만달러의 변호사 비용이 더 드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5,000달러의 합의는 성공적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떨떠름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런 모든 일을 돈이라는 관점에서 해결하려는 미국의 풍조가 문제인 것 같았다. 돈이 더 들어가느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판단하기보다는 돈이 좀 들어가더라도, 이런 일은 원칙 준수의 관점에서 해결해야 이런 사기성 고소 풍조가 사라지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돈 얼마나 아끼느냐 보다도 돈이 좀 들더라도 얼마나 올바른 방향으로 문제를 접근하느냐, 즉 원칙을 고수해야 할 일이었다. 말도 안되는 사건을 갖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에게 귀찮아서 던져준 돈이 작은 돈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일들이 다음의 사건들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사회의 가치관이 퇴화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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