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시대 지나고 동아시아 시대온다"

2000-07-1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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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석 내 의견은 이렇습니다.

한국학계 대표적 진보 정치학자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손호철교수(48)가 안식년을 맞아 UCLA에서 연구활동을 하기 위해 1년 예정으로 LA에 왔다. 손교수는 지난80년 도미, 유니버시티 오브 텍사스에서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83-88년 한국일보 LA지사 기자로 근무한 경력도 있는 미국통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만 평가하다보면 비판적으로 흐르기가 쉽다. 그런 점에서 국내학자들의 한국 현실에 대한 평가가 외국학자들에 비해 부정적이고 가혹하다고 볼 수 있다. 좀더 떨어진 위치에서 한국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기회를 갖고자 LA에 왔다"는 그를 만나 다시본 미국의 모습과 한국경제의 현주소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손교수는 LA한인커뮤니티가 낯설지 않은 사람이다. 10여년만에 직접 본 LA한인사회와 미국이 과거와 비교해, 또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과 비교해 얼마나 달라졌는가.

▲LA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전체가 88년 내가 한국으로 떠날 때 보다 그리고 90년대 몇차례 다니러 왔을 때와 비교해도 훨씬 깨끗해졌다. 미국사회가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혜택을 한인커뮤니티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가는 전에 비해 많이 올랐다. 이번에 와서 한인타운에 아파트를 구하는데도 크게 애를 먹었으며 렌트도 옛날보다 엄청나게 뛴 것을 보고 놀랐다.

잘 살고 있다 보니 사람들이 자신감에 넘치지만 약간은 배타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또 전에 미국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그동안 한국에서 적당주의에 젖어 살다가 온 탓인지 매사에 절차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까다롭다. 불필요한 페이퍼웍이 왜 그리도 많은지 짜증이 날 지경이다.


-손교수가 어느 본국신문 칼럼에 "지금 미국이 호황이 아니라 불황직전의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쓴 것을 봤다. 정말 미국이 이제 불경기로 접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미국이 당장 불경기로 접어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는 우리 속담대로 영원한 호경기란 있을 수 없다. 언젠가는 불황이 오게 마련이다. 지금 미국경제의 호황을 생산부문이 아닌 주식과 금융부문이 주도하고 있는데 과거 19세기말 영국이 무너지던 때도 그랬다. 불이 타오르다가 꺼지기 직전 마지막 반짝할 적이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로 볼 수도 있다. 다시말해 지금 미국의 흥청거림이 그동안의 호경기 사이클이 쇠퇴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학자들 사이에 동아시아 경제패권설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거 제노바,네델란드,영국,미국으로 이어져왔던 세계경제의 패권주기가 일본과 중국을 축으로 하는 동아시아권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시대가 오면 미국에 사는 한인들에게는 어떤 영향이 미치게 되는가. 우리는 거기에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가.

▲미국 특히 이곳 남가주 한인커뮤니티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살고 있다. 미국의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동아시아로 이전되는 세계경제의 흐름을 잘 관찰하고 있다가 잘 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국도 동아시아권의 한 축이 되는가. IMF체제는 끝났고 한국경제는 회복됐는가.

▲김대중대통령은 작년 IMF체제 2주년을 맞아 졸업을 선언했다. 그런데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95%가 ‘IMF가 아직도 안끝났다’고 생각하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측간에 인식의 갭이 크다.

정확히 말하자면 IMF는 끝났다. 끝나긴 끝났는데 IMF이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변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하에서는 고용이 불안정하고 빈부간에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다. IMF가 끝나면 ‘굿 올드데이스’가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20대80’의 엉뚱한 사회가 나타난 것이다. 20%는 더욱 부자가 되고 80%는 점점 도태돼 가난해지는 사회 말이다. 그 때문에 국민들의 마음이 불안하고 IMF가 끝났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변했는데 사람들이 인식의 전환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현재 한국경제의 3분의1은 외국자본이 잠식했다. 덕분에 외환 보유고가 사상최고로 늘어났고 물가상승률도 한자리로 묶어두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과정에 외자를 지나치게 많이 끌어오고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오히려 4대재벌 중심체제로 재벌 편중을 심화시켰다는 것은 문제다. 현재 한국의 빈부격차는 70년대이래 가장 크다. 전체노동자의 50%가 비정규직이고 신규 노동자의 92%가 비정규직이라는 것은 우리사회가 전형적 미국식 ‘고용 불안정’의 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식 자유주의 경제란 구체적으로 어떤 체제인지 다시한번 설명해달라.

▲옛날 한국은 복지제도는 제대로 안돼 있었어도 실업률은 낮고 안정된 직장이 있었다. 반면 서구사회는 실업률은 높지만 사회복지는 좋았다. 그런데 최근들어 한국에서 안정된 직장이 사라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92%가 임금수준이 낮고 고용보장이 안되는 비정규직이다. 사회복지제도는 걸음마단계에 지나지 않고있는 상태에서 서구식 고용 불안정과 한국식 복지부재라는 최악의 조합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현재 한국의 복지예산은 GNP의 3~4% 수준이다. 영국의 경우 가장 낮았다던 대처시절에도 23~24%에 달했다. 사회복지제도가 잘돼있는 서구국가들이 평균 30%고 미국도 20%가 넘는다.

-그렇다면 한국경제는 이제 다시는 옛날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인가.

▲미국식 모델을 따르는한 그렇다. 최근 일련의 파업사태를 ‘집단적 이기주의’로만 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경제적,사회적 모델은 무엇인가" 다시한번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한국의 문제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에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고통분담이 안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조정에도 국민적 합의장치가 필요하다. 예를들어 요즘 공기업을 민영화한다는데 민영화만이 해결책은 아니다. 개혁위원회를 만들어 합의를 도출해내야 한다. 한전해외매각도 국민의 70%가 반대한다는데 쉬쉬해가며 추진하고 있다. DJ정부 출범초기에는 IMF 위기로 국민적 합의 없이도 가능했지만 이제는 안된다. 최근의 사태도 그동안 정부의 일방적 추진에 대해 누적돼 있던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이를 집단이기주의로 몰아 마녀사냥하듯이 때려잡을 일은 아니다.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공론화해야 한다.

-공론화라는 것이 개혁추진에 있어서 비효율적인 점도 있지 않은가.

▲YS도 실패했고 DJ도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 바로 개혁독재다. 민주적 방식으로는 개혁이 안되니 개혁을 위해서 독재를 한다? 바로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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