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태어난 아들이 만 두살 때 영어만 사용하는 프리스쿨에 처음 들어갔을 때였다. 하루는 집에 오더니 심각한 얼굴로 자기도 노란 머리였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이제부터는 집에서도 영어만 쓰자고 했다.

이제 겨우 두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 입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들은 한국어를 미처 모국어로 충분히 습득하기도 전에 2살부터 미국 프리스쿨에 다녔는데 그 결과 아이의 영어, 한국어 양쪽 모두가 또래 아이들보다 상당히 지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국어에서 충분한 습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하루 대부분을 제2 언어에 접하게 될 경우 결국 양쪽 언어 모두에 심각한 장애현상이 일어나는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미국에서 자라는 한인 2세들은 대개 만5세 정도까지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다가 학년이 높아질수록 그리고 영어문화권에 더 친숙해질수록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많은 한인부모들은 아이들의 한국어 사용이 영어습득에 지장을 줄까봐, 또 한국어로 일일이 말하자니 아이가 잘 알아듣지 못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해서 가정에서 아이들의 영어 사용을 묵인한다.

과연 2세들의 한국어 습득은 영어 습득에 지장을 초래할까? 한국어 구사능력과 다른 인지능력과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나는 개인적인 궁금증을 가지고 지난 일년동안 UC 소수언어연구소의 지원을 받아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인 2세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습득 과정과 한국어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해 보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계속 한국어로 수업을 받은 학생일수록 스탠포드 9 테스트에서 영어를 포함한 모든 과목에서 훨씬 더 우수한 성적을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즉 유치원에서는 똑같이 영어능력 미숙학생이었지만 학교에서 꾸준하게 한국어로 수업을 받은 한인 2세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2세학생들보다 4년후 영어, 수학, 읽기 능력 등 모든 스탠포드 9 테스트에서 월등하게 나은 점수를 보였다.

이런 결과는 교육학에서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2세들의 경우 미세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정도로 한국어 수준이 되어 있다면 영어를 배울 때도 같은 인지 능력이 적용되기 때문에 더 유리하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반대로 집에서 줄곧 한국어를 쓰다가 미국 정규학교에 들어가면서 한국어 사용을 중단할 경우 일반 인지능력의 저하뿐 아니라 아이가 겪는 사회 심리적 충격은 엄청나다. 집에서 쓰는 한국어가 주류사회와 학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아이는 당연히 위축감과 함께 한국어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한인타운 근처에 있는 몇몇 초등학교에서 미국 내에서도 시범이 될 정도로 우수한 이중언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한인 학부모들의 반응은 그래도 우리 아이가 일단 영어부터 유창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영어로만 수업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꾸준한 한국어 교육은 오히려 영어 습득에 큰 도움을 가져온다는 것을 이번 연구는 분명히 증명해 주었다.

이런 결과를 올해 3월 벤쿠버에서 있었던 미국응용언어학회에서 발표했더니 청중 중의 한 캐나다 교수가 프랑스어와 영어가 사용되는 캐나다의 이중언어교육에서는 이미 이런 긍정적 결과가 오래 전부터 확인된 사실이라면서 왜 한국어-영어 이중교육이 더 많은 미국학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지 안타까워했다. 한국어교육과 프랑스어 교육의 차이는 바로 이 사회가 보여주는 편견을 반영한다. 즉 한국어는 소수민족 언어일 뿐 아니라 한인들 스스로가 정규학교 교과과정으로 2세들에게 가르치기를 기피한다.

그 결과 2세들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신감과 뚜렷한 비전이 없다. 그러나 2세들의 모국어 능력의 꾸준한 발달은 부모들이 그토록 원하는 영어습득을 앞당길 뿐만 아니라 다른 논리 능력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는 것을 여러 연구는 분명히 보여 준다. 다만 정규 미국학교에서 이중언어 교육을 실시할 경우 그 구체적인 방법과 교과과정, 교사자질 등이 큰 변수로 작용한다는 것 역시 생각해 볼 문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