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평양 회담과 김정일 재발견

2000-06-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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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칼럼

▶ 이철주필

군부 독재 정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군부대를 시찰하는 것을 보고 “세상 정말 달라졌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다.

평양 순안 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을 때 느껴진 것은 “세상 정말 달라졌구나”가 아니라 “아, 역사가 변하고 있구나”였다. 그것은 독일 국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망치로 깨서 무너뜨리는 것을 보았을 때의 가슴 벅참과 비슷한 것이었다. 세상이 변하는 정도가 아니다. 역사가 다시 쓰여지고 있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사람의 편견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김정일’ 하면 배가 볼록 나온 체격에 술 잘 먹고, 놀기 좋아하고, 예측할수 없는 거친 성격을 가진 지도자로 머리에 그려졌었는데 순안공항 장면 이후 “김정일도 괜찮은 사람 같은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활달하고, 재치있고, 통이 큰 지도자 같다니 ‘사람 마음 여우 마음’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 순안공항 환영사에서 드러난 또 하나의 그림은 ‘북한의 실세와 허세’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행사 참석은 참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권력서열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과거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노동절 퍼레이드가 펼쳐졌을 때 누가 어디에 섰느냐를 두고 소련 공산당의 실세와 허세를 구분했던 적이 있었다.


북한에서 출세하려면 학벌이 좋아야 하고 당성이 강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만경대학원’을 거친 후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 있는 노동당 조직에서 근무해야 실세가 될 수 있다. ‘만경대학원’은 빨치산등 혁명 1세대의 자녀들만 다니는 초, 중고등학교로 교육부 소속이 아니라 인민 무력부 소속인 것이 특징이다. 김정일도 ‘만경대학원’ 출신이며 김대중 대통령이 전용기 트랩을 내려올 때 김정일 위원장과 함께 서 있던 김국태, 최태복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들도 모두 만경대학원 출신이다. 그러니까 TK, PK니 목포고, 광주고니 하면서 시대에 따라 힘쓰는 출신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는 영구불변 만경대학원-김일성 대학이 실세로 통하는 문이다.

이날 공항에 나오지 않은 실세중의 실세는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 당중앙위 제1부부장이며 김정일의 화신으로 불리운다. 대남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김용순비서도 당 4인방에 들어 간다. 김정일 위원장이 백화원 영빈관에서 “오늘 연도에 얼마나 나왔나?” 하고 물으니까 “60만명쯤 나왔습니다”라고 대답한 바로 그 인물이다. 외교통인 김용순은 춤 잘 추고 노래 잘 하고, 술 잘 먹어 김정일은 그가 늦게 도착하면 파티를 연기할 정도라고 한다.

순안공항 환영행사에서 우리에게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것은 김정일위원장 측의 퍼스트 레이디가 얼굴을 안 비친 사실이다. 이희호여사의 카운터파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외교의전인데도 김정일의 부인 김영숙의 모습은 끝내 찾아볼수 없었다.

원래 공산주의에서는 남녀평등이고 여성이 남성보다 더 가정에서 발언권이 센 법인데 북한은 여성대우 부문에 있어서는 전혀 공산주의 답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양곡배급이 나오면 여자가 짊어지고 와야 하고, 남자는 아내에게 존대말을 쓰는 법이 없고, 밥상에서 고기와 달걀도 아버지와 아들에게 먼저 주는 것이 가정준칙처럼 되어 있다고 한다. 북한 귀순자들이 제일 먼저 남한에서 놀라는 것중의 하나가 남자들이 죽어 지내는 사실이다. 어느 귀순자는 TV 좌담회에서 조크로 “남한에서 여자가 이렇게 드센줄 알았더라면 귀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평양 TV 중계는 한마디로 ‘김정일 쇼크’를 몰고 왔다. “절대 섭섭하지 않게 해줄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요”라는 김정일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수수께끼다. 퍼스트레이디를 대동하지 않고 공항에 직접 마중나온 것도 우리 기준으로 보면 불가사의다. 좌우간 남북정상회담은 여러 가지 면에서 ‘김정일 재발견’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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