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정일이 인민복 벗는 날

2000-06-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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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인민복을 입고 갔다. 반면 그를 맞은 장쩌민 중국 국가 주석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장주석의 임무는 북한을 경제 파탄으로 몰아 넣은 모택동식 의상을 벗기고 경제 개혁이란 새 옷으로 갈아 입히는 것이었다. 남북 정상이 공동합의서에 서명한 것을 보면 장주석의 노력이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정상회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번 합의서를 가능케 한 일련의 움직임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카터 전대통령은 대담하게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평양으로 날아가 북한 지도자들에게 한반도 비핵협상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당시 워싱턴에서는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나돌았다. 몇 달 후 로버트 갈루치는 핵개발 포기 조건으로 원자로를 지어주겠다는 협정을 북한과 맺어 남북관계 개선의 전기를 만들었다.

당시 민주 선거를 통해 당선된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도 북한의 마음을 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대통령은 군부의 세력을 꺾음으로써 다시 군인들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길을 봉쇄했다. 김대통령은 나에게 “우리는 권위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했다. 이 나라에 쿠데타가 일어나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경제적 번영과 민주화가 북한의 대남정책을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96년 동아시아를 순방하면서 한국을 빼놓는 실수를 저지를 뻔했으나 한국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번복했다. 클린턴 방한을 계기로 미국의 대한반도 외교는 활성화됐다.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를 통해 원자로 공사가 시작됐다.

97년에는 예상을 뒤엎고 감옥에 간 적도 있는 야당 지도자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대통령은 취임전 나와 가진 인터뷰에서 정상회담을 위해 언제라도 북한에 갈 용의가 있다고 말했었다.

99년 클린턴은 의회의 강경파를 무마하기 위해 의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으로 대북한 정책 보고서를 작성케 했다. 한국의 햇볕정책과 보조를 같이 하는 이 보고서가 지금 미국의 대북 정책의 기본이 되고 있다.

북한에 대해 관망자세를 보이고 있던 일본도 북한이 미사일을 쏘자 갑자기 대미사일 방어체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방어체제가 대만까지 커버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중국은 북한측에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아마 김정일의 마음을 돌리는데 주효했던 것 같다.

한국에 영구 평화가 정착됐다는 보장은 없다. 이번 합의서에 서명할 때도 김정일은 인민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94년부터 세계 강대국들이 공동보조를 취해 왔기 때문에 한반도에 영구 평화가 찾아올 가능성이 가시화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과 합의서는 잘 하면 세계 외교사는 물론 아시아 최대의 터닝포인트의 하나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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