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들의 쓸쓸함.

2000-06-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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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물고기 중에 가시고기라는 어종은 수컷이 새끼들을 돌본다. 암컷은 알만 낳고 가버리고 수컷이 혼자 남아 알들을 돌보는데 틈만 나면 다른 물고기들이 먹어버리기 때문에 먹지도 자지도 않고 지킨다. 그렇게 태어난 새끼들은 모두 제갈길로 떠나고 임무를 마친 수컷은 돌틈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버린다고 한다.

같은 제목의 소설에 나오는 설명이다. 한국에서‘가시고기’라는 소설이 대단한 화제라고 해서 읽어보았다. 백혈병에 걸린 10살 짜리 아들을 살리려고 전재산을 바치고 나중에는 장기까지 파는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이 묘사돼 있다. 아내는 화가의 꿈을 쫓아 떠나버리고 혼자 남아 아들을 돌보다 결국 아들은 살려내지만 자신은 암으로 죽고 만다는 줄거리가 가시고기의 일생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작가 조창인씨 스스로가 말했듯이 대중적인 가벼운 소설이다. 그러나 다루고 있는 주제는 가볍지 않다. 작가는“흔히 감춰져 느끼기 힘든 아버지의 자식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는데 요즘 사회적으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못 받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인 것 같다.‘어머니’에 대해서는‘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하다’는 분위기인 반면‘아버지’에 대해서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감사 보다 요구 일색이다.


‘아이들과 놀아줘야 한다’‘설거지해야 한다’‘휴일이면 가족과 공원에 나가야 한다’… 이런 저런 ‘좋은 아버지 10계명’들이 유행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들이 존경받고 대접받는 존재라기 보다는 지적받고 야단맞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화목한 가정, 자녀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좋은 아버지’는 분명히 필요하지만 시각이 너무 아내나 자녀 쪽에 치우친 감이 있다. 아버지 쪽에서 보는 데 인색하다.

지난해 초 남가주 한인사회에서는 유난히 총기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남편이 아내와 동반자살한 사건, 전처와 자식을 살해한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총기소지의 위험성, 한인 남성들의 불같은 성격들이 지적되었다. 당시 총기교육을 담당하는 한 경비훈련학교의 교사는 이런 말을 했다.

“문제는 좌절감입니다. 미국 사는 한인 남성들 참 외롭습니다. 이민와서 주눅들어 사는 것도 힘들지만 한국에서처럼 스트레스 풀데가 없는 게 더 문제입니다. 한국에서야 아무리 속상해도 친구들 만나 술 마시며 소리도 지르고 하다 보면 풀리지요. 여기선 그게 쉽지 않지요. 게다가 집이라고 들어가도 아내는 아내대로 일하고 들어와 지쳐있으니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이들과 대화를 하라지만 아이들이 말을 듣나요? 사춘기만 되면 제 방문 탁 닫아놓고 얼굴도 내밀지 않으니… 완전히 외톨이지요”

현재의 아버지들은 요즘 사회가 요구하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도 하는 방법을 모르는 혼란스런 세대다. 역할 모델이 없기 때문이다. 세아이를 키우는 한 부인이 말했다. “우리 남편은 평생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몇백마디도 안되었다고 해요. 그러니 자상하게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지요”

많은 경우 아버지에 대한 자녀들의 오해, 그로 인한 아버지의 소외감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표현이 없어서이다. 사랑의 표현도 훈련이고 학습인데 그 부분에서는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버지와 아이들이 즐겁게 어울릴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대개의 어머니들이 평소에는 아버지를 개입시키지 않다가 자녀들을 야단칠 때만 아버지에게 악역을 맡기는 데 그것은 문제다. 야단만 맞으면서 아이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기는 어렵다.

“아내가 아이들만 돌보느라 남편은 항상 뒷전인 것”도 때로는 아버지들을 쓸쓸하게 한다. 두 아들에게는 지극한 정성을 쏟으면서 남편에게는 데면데면한 한 주부를 보고 친지가 이런 농담을 했다. “당신 아들만 위하지 말고 남의 아들도 좀 위해 주세요”-남의 아들은 바로 시어머니의 아들, 남편이다.

사랑을 느끼고 관심을 받고 싶기는 남녀노소가 마찬가지다.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다. 내일 ‘아버지날’아이들이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도록 어머니들이 가르쳐야 하겠다. 그것이 ‘좋은 아버지’ 만드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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