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여, 어깨를 펴라

2000-06-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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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날에 생각해 본다

미국지사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한국발령을 받고 다시 97년 1월에 한국에 갔다. 간지 6개월만에 회사가 부도사태를 맞게 되고 그 여파로 나라가 IMF체제로 들어갔다. 그후로 2년여, 그야말로 IMF 현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관리체제로 들어간 회사가 끝내는 다른 회사로 넘어가 버리자 정신없이 14년간 청춘을 바쳤던 정든 회사를 물러났다.

회사를 그만두기전에 남편은 나에게 미리 전화를 해서 사퇴에 대한 자기의 결심을 밝히고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사실 그때 남편은 새 회사에 계속 남아서 일해주기를 부탁받은 상태였다. 어쨌거나 나는 두말 않고 당신 생각대로 그만두고 오라고 했다. 물론 은근히 닥쳐올 새 생활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나중에야 어찌되든 그 동안 스트레스 속에서 지쳐만 보이는 남편이 하루 빨리 돌아와 쉬기를 바라는 심정 또한 간절한 것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열다섯난 아들이 “아빠는 그렇게 대책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면 어떡해!” 하며 우울하게 불쑥 내뱉는 것이었다. 아직 세상도 모르고 철없게만 여겨지던 아들이 그런 소리를 해오니 솔직히 뜨끔하고 놀란 기분이 먼저 들었다. 아마도 뭔가 불리해진다는 느낌을 받고 저도 모르게 걱정이 되어 무심코 한 말이겠지만 가뜩이나 힘든 아빠에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다니 하는 심정이었다.


요즘 아이들의 물질추구적인 성향과 실리에 익숙한 사고방식, 그리고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자란데서 오는 이기적인 면들이 늘 걱정되고 못마땅했었는데 그 부작용이 현실로 다가오는가 싶어 철썩 가슴이 내려앉는 것이었다. 아직은 아빠가 젊고 능력이 있으니 희망을 가지자고 질책반 설득반조로 말을 하면서도 아들의 반응이 야속하다 싶은 마음이 남았다. 이러니 남편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눈치를 보이면 얼마나 서운할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하면서 말이다. 나중에 아빠가 돌아와서 그 얘길 했더니 나보다 더 충격을 받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아들이 자기는 아빠가 회사를 갑자기 무작정 그만두는 것 같아 자기의 생각을 표현했을 뿐이지 아빠에게 불평하거나 서운하게 할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고 변명 섞인 사과를 하긴 하였다.

어쨌든 아빠의 사퇴이후로 아이들은 우리가 예전처럼 돈을 낭비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눈치고 철도 많이 든 모습이다. 나는 주위에서 부부가 열심히 일을 하며 넉넉치 않은 생활속에서 정성으로 키우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부모를 더욱 생각해주고 열심히 공부하며 착하게 커나가고 있는 것을 보아왔다.

남편이 당분간은 아무데나 뛰어들지 않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겠다고 선언한지 이제 1년반도 넘어간다. 남편이 일을 쉬면 이제는 내가 일한다고 큰 소리치던 나도 그 동안 십수년을 너무 집에서 뒹굴기만 해서 세상물정에 어둡고 경력이 짧아 두세곳 이력서를 내봤는데 응답이 오지 않자 갑자기 세상이 무서워지고 있던 용기마저 사그러 들어 나 몰라 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이럴 때 힘이 되어주지 못해 그저 면목없고 미안할 뿐이다.

아버지의 날에 즈음하여 나는 빌어본다. 세상의 지친 아버지들이여, 고개를 똑바로 들고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예전처럼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 우리 아내들과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세상에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기를...
<윤순호, 아케디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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