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강명화 선생과 아들 5형제, 부부 4쌍 ‘온가족 독립운동’

2015-08-14 (금)
작게 크게

▶ 대한인국민회 결성과독립자금 모금에 앞장

▶ 김혜원·이화숙 여사 등남편과 국권회복 헌신

강명화 선생과 아들 5형제, 부부 4쌍 ‘온가족 독립운동’

김성권 선생과 김혜원 여사. 2남 김인의 USC 졸업식 때.

강명화 선생과 아들 5형제, 부부 4쌍 ‘온가족 독립운동’

부친과 5형제 등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강명화 선생의 자녀들. 뒷줄 왼쪽부터 장남 강영대, 4남 강영상, 3남 강영문, 5남 강영각, 2남 강영소 부부와 아들. <한인역사박물관 제공>

조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고통받던 시기, 분연히 떨쳐 일어서 저항했던 사람들. 안락한 삶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걸었던 선각자들. 우리는 그들을 독립운동가라 부른다.

미주지역에서 활약했던 독립운동 유공자들이 2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난 가운데(본보 12일자 A1면 보도), 독립운동에 한 몸 바치기도 쉽지 않은데 미국에서도 부모와 자녀, 부부 등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열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뜻 깊은 광복 70주년을 맞으며 아무런 대가도 바람도 없이 역사 속으로 기꺼이‘나’와‘가족’을 던졌던 미주 한인 독립운동 일가족과 부부 독립 운동가들을 재조명해 본다.


■부친과 5형제 독립운동 투신

강명화(애족장) 선생과 가족들은 1905년 4월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온 뒤 대한인국민회 간부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자금을 지원해 왔다. 특히 차남 강영소(독립장) 선생은 하와이 도착해 5월 미국 땅에서 함께 도와가며 살자는 목적으로 ‘에와친목회’를 만들어 항일 독립운동을 최대의 사업목표로 정한 뒤 군자금을 모금하기 시작했다.

이어 1906년에는 호놀룰루에서 공진회를 결성하고, 1909년 1월 미주 지역의 통일된 독립운동 단체로 국민회를 결성하는 등 미주 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장남인 강영대(애족장) 선생과 4남인 강영상(대통령표창) 선생은 1909년 이후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결성에 참여해 중요 간부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또 1914년 평양에서 가족들과 합류한 3남 강영문(애족장)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집행위원장을 역임, 막내 강영각(건국포장) 선생은 1925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국민보’의 영문 주필로 독립운동 선전운동에 종사하는 등 부친 강명화 선생과 5형제가 모두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 건국포장, 독립장, 대통령표창 등 온 가족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는 영예를 안았다..

■부부 독립유공자들

미주 지역에서 활동한 200여명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는 4쌍의 부부 독립유공자들이 있다. 우선 대외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부인 이혜련 여사다. 도산 안창호(대한민국장) 선생의 독립운동을 도운 부인 이혜련(애족장) 여사는 1902년 18세 때 안창호 선생과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와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결성하는 등 미주지역 한인사회를 지도하는 한편 국권회복 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이 시기 이혜련 여사는 남편이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 여사는 도산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를 지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의연금, 국민 의무금, 특별 의연금 등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단장을 지낸 김혜원 여사와 흥사단 이사장을 지낸 김성권 선생 부부도 대한민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LA의 대표적인 부부로 손꼽힌다.


김혜원(애국장) 여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같은 해 8월5일 중가주 농장지대 다뉴바에서 한인 여성들의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을 결성, 초대 단장을 맡으며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했고, 김성권(애족장) 선생은 한학자로 흥사단 재무를 거쳐 이사장까지 지내며 조국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승만·박용만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린 정순만 선생의 아들인 정양필(애족장) 선생과 이화숙(애족장) 여사도 미국에서 독립운동 및 군자금 조달에 헌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05년 도미한 정양필 선생은 1919년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비밀회의를 갖고 국민대표 25명의 한 명으로 활약했으며 미주 지역에서 군자금 조달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아내 이화숙 여사는 한성 임시정부 창립 때 공약삼장의 대한민족 대표 30인 중 1인으로 참가한 뒤 중국 상해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 후원단체인 대한적십자호의 상의원·애국부인회 회장 등으로 활약해오다 도미해 광복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출자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한 후원활동에 주력했다.

이 외에도 권도인(애족장) 선생과 이희경(건국포장) 여사 부부는 지난 1902년 하와이로 이주해 대한인국민회 간부로서 독립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여사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다시 하와이로 건너가 독립운동 자금 모금운동을 펼치는 등 부부가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헌신했다. 이들 부부의 유해는 2004년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김철수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