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차 한잔의 초대/ 하명훈 재활의학 전문의·미동부한국문인협회 회장

2015-06-0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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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 잣대가 행복이라면 나는 성공한 사람”

차 한잔의 초대/ 하명훈 재활의학 전문의·미동부한국문인협회 회장

<사진 =천지훈 기자>

하명훈은 의사이다, 시도 쓴다. 문학을 사랑하며 태권도의 정신을 간직한 채 환자를 돌보며 산 이민 40년, 문무의(文武醫)의 절묘한 조화가 있는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

▲인생이란 그런 것
원래 의사를 꿈꾼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응명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4H 클럽 농촌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 금릉군 농촌지도소에서 호박은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된장은 어떻게 담그는 지 등의 농사지도를 하고 동회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문명퇴치운동도 하고, 어려서부터 막연히 농촌 지도자가 되려고 했다.”

경북 금릉(현재 김천) 출생인 하명훈은 학생과 교실 수가 적은 시골학교를 다녔는데 2학년이 합반이다 보니 3년만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5남1녀 중 네 번째 아들인 그는 나이차가 많은 맏형을 따르고 존경하였는데 김천고등학교 2학년 시절, 맏형이 “의사가 되어 봉사를 하며 사는 게 어떠냐?”고 했다. 하명훈은 그때부터 서울에 있는 의대를 가기위해 재수도 불사하며 공부를 했다.


71년 고려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의사가 되었고 “당시 정외과를 다니던 형은 훗날 시골마을 상주의 농촌 지도자가 되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고 말한다. 250호 남짓한 작은 마을에서 의사가 나온 일은 처음으로 온동네의 자랑이 되었다. 하명훈은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던 아버지가 넌지시 큰아들에게 ‘명훈이는 의사를 하게 하면 어떠냐“는 한마디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그가 미국에 오게 된 것도 그랬다.

김천 중학교 시절 일본 여학생과 펜팔을 했는데 주위 사람들은 “명훈이는 외국에 가서 살려나보다”는 말들을 했다. 그 역시 언젠가 외국에 가서 살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은연 중 했다. 펜팔을 하던 소녀는 오래 전, 일본에 대지진이 난 후 연락이 두절되었는데 지금도 당시 주고받던 영문 편지와 사진 속 얼굴이 기억난다니, 이럴 때 시를 쓰게 되는 것같다.

▲맨하탄 한복판에 나를 떨어뜨려라
“군대를 3년 다녀온 후 서울에서 6개월간 미국 갈 준비를 했다. 65학번 대학동기가 당시 롱아일랜드 낫소카운티 메디칼센터 인턴으로 있었는데 무조건 오라고 했다. 둘째 딸을 가진 만삭의 아내와 큰딸을 데리고 1975년 뉴욕에 왔다. 비행기표는 월부로 사고 그 티켓값 1,200달러 정도만 쥐고 왔다.” 친구의 인턴 숙소에 온가족이 1주일간 있다 보니 더 이상 그래선 안될 것 같았다.

“우리를 무조건 맨하탄 한복판에 떨어뜨려달라” 그래서 그는 무작정 가족을 이끌고 맨하탄 43가 브로드웨이와 7가 애비뉴 코너에 내렸다. 타임스퀘어 모텔인에 한달간 묵으면서 그가 한 일은 매일아침 약도를 보면서 길을 익히고 행인들과 대화하며 영어를 배우고 지나가는 지역 병원마다 들어가 “잡 없느냐?”고 묻는 일이었다. 걸으면서 태권도 도장 할 만한 자리도 물색했다는데 이는 그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

의대생들은 스트레스가 많다보니 주로 바둑을 두곤 했지만 그는 바둑만 보면 더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래서 대구의 도장에서 태권도를 배워온 형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집 마당에서 가르쳐 준 태권도를 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그는 도복을 들고 서울역 뒤에 위치한 도장에서 몸을 풀며 수련을 했다.

“트레이닝 자격시험만 통과했기에 내과, 외과, 어디라도 인턴 자리만 있으면 들어가겠다고 했으나 다들 이미 뽑았다고 했다. 4월말이니 잡이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태권도 공인 4단으로 국제사범 자격증을 지니고 왔기에 인턴 자리를 못 구하면 태권도 사범을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런데 한달만에 직장이 생겼다. 50가 브로드웨이의 프렌치-폴리클리닉 메디칼 스쿨 앤 헬스센터에 7월에 오기로 한 인턴이 오지 않아 빈자리가 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일반외과 인턴생활 1년을 보낸후 정형외과 레지덴시를 끝내고 재활의학 전문의 수료과정에 들어갔다.


1977년부터 메트로폴리탄 하스피탈 재활의학 전문의 레지덴시 2년반, 뉴욕메디컬 칼리지 레지덴시 & 펠로우십 트레이닝 등을 거쳐 드디어 80년 6월, 재활의학 전문의 과정을 끝내고 필기시험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재활의학 전문의 자격증을 받았다.

하명훈은 1980~2004년 뉴욕대 산하 VA메디컬 센터 신경근육 검사실 실장, 95~99년 브루클린 메리 하스피탈 재활의학과 과장 등을 파트타임으로 하며 82년 플러싱 바우니 스트릿에 개인 병원을 열었는데 이때 그야말로 일인삼역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2013년부터 벨뷰 하스피탈, 뉴욕대 랭곤 메디칼 센터 재활의학 전문의, 현재도 뉴욕대 재활의학 임상교수로 가르치면서 플러싱 149스트릿에서 하명훈 퀸즈 통증재활의학센터 문을 열고 있다.

▲무료건강진료 시작
“70년대말~90년대초 퀸즈한인천주교회에서 한인건강 무료진료를 했다. 그 후엔 개업의협회와 간호협회 공동주최로 플러싱하스피탈에서 여는 무료건강진료 행사에 참여했다.”
또한 80년~2000년까지 라이온스 클럽에서 활동했는데 1996년 회장으로 있을 때 처음으로 ‘눈의 날’ 행사를 시작하여 한인 저소득층에게 안경을 해주고 눈수술도 해주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로인해 그는 국제라이온스클럽 회장상, 라이온스 클럽 재단상을 받기도 했다.

90년대말에 개업의협회 회장을 하며 학회지에 의료 논문을 주로 기고하던 그는 마침내 글짓기를 잘 하던 초등학교 소년의 감성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문학 21’, ‘시대문학’으로 한국문단에 등단했고 2003년 첫시집 ‘징소리’를 출간했다. 시의 소재는 퀸즈, 어머니, 이민자의 고향, 이민의 길 등 그가 살아온 삶의 고비 고비를 잘 담아냈고 ‘감성과 이성이 잘 조화되었다’는 평을 듣는다.

▲영어로 시를 쓰자
“자다가도 일어나서 쓰고 길 가다가도 쓰고, 시상을 떠올리면 써온다.”는 그의 필명은 하운(河雲)이다.

“초등학교 4,5학년때 김천 시내 냇가를 걸어가는데 물위에 비친 구름을 보았다. 말없이 흘러가는 여름 구름, 언젠가 글을 쓰면 내 필명을 하운이라 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그는 현재 재활전문의로 오피스 문을 열고 한달에 두 번 NYU 임상교수로 일하는 한편 제15대 미동부한국문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한글 시집 한권, 영문 시집 한권을 낼 계획이다. 앞으로 영어로도 시를 써야 한다. 뉴욕문학 제25집이 6월에 출간되어 23일 대동연회장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경희대 김종해 교수 초청 이병주 문학 강연도 한다.

12월에는 영문판 뉴욕문학 제1집이 나올 예정이다. 한국문학을 주류사회에 알리고 2세들의 참여를 위해서 영문판을 계속 내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이번 ‘뉴욕문학’에는 73명의 회원이, 영문판 ‘뉴욕문학’에는 29명의 회원이 참여했다.

▲좋은 의사가 되는 길
하명훈과 아내 하미나 슬하에는 딸 셋을 두었고 큰딸 여울은 첼시의 갤러리 디렉터, 둘째 수전은 뉴욕대 캔서 리서치, 셋째딸 모나는 뉴욕시티 하우징 파트 어드바이저로 일한다.

70인생을 돌아보며 그는 가장 좋았던 시기를 말한다. “살다보니 희망이 뭔지도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열심히만 살다가 2008년 큰딸이 첫 손자를 낳았다. 그때 희망을 보았다. 이것으로 너희는 효도를 다 했다. 더 이상 효도 안해도 된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에게 손자 노아가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만 하다.

“살아가는데 있어 자신이 한 선택에 매달려 간다. 한번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태권도에 대한 향수는 항시 있다. 가장 뛰어난 의사는 되지 못했다. 대신 좋은 의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한사람이라도 내 시를 읽고 위안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한다는 말도 있지만 성공이 무엇인가, 행복하면 된다.”

하명훈은 문무의(文武醫)-삼위일체의 삶이 꿈이었고 지금도 그 꿈을 지키고자 하는 순진함이 그에게 시를 쓰게 만드는 것 같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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