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임란 전 조선사람은 패셔니스트”

2013-05-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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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 크고 넓으며 장식 다양 디자인 감각 탁월한 복식문화 전후 작아지며 수의 사용 출토 유물 통해 변천사 정리

▶ 속곳·치마 둘·저고리·원삼 10벌 껴입는 여자 옷 시연 12일 또 한번의 강연 주목

“지금 우리가 아는 한국의 전통의상은 모두 19세기부터 20세기 초의 조선 후기 의상에 국한된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성한 의상문화를 갖고 있었어요. 500년 전의 디자인 감각이 지금 보아도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세련된 수준이었음을 최근 출토된 의복들을 통해 알게 됐지요.

우리나라 복식사는 새로 써야 합니다”9일과 12일 게티센터 한복 세미나 강연 차 LA에 온 박성실(70) 전 단국대교수의 한복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 흥미로운 사실들로 가득하다. 우리 옷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그는 수백년된 분묘에서 나온 옷들을 정리 복원 연구하면서 우리나라의 복식문화가 그동안 배워온 것과는 너무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이를 바로 잡는 일을생의 과제로 삼고 있다
현재 난사 전통복식문화재연구소장인 박 교수에 따르면 한국서는 1980년대 이후 아파트를 많이 짓고 길도 많이 내면서 출토 복식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수백년된 분묘를 이장할 때 관 속에서 옷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옷들을 연구해 보니 우리나라의 복식형태와 문화는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되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임란 전의 선조들은 수의의 개념이 없이 평소 입던 옷이나 혼례복을 수의로 입기도 하는 장례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관 속에서 시신이 움직이지 않도록 가능하면 많은 옷을 켜켜이 쌓아 넣었기 때문에 일부 미라가 된 시신과 함께 나온 의상들을 연구할 수 있게 됐지요. 수의를 따로 만들어 입히는 문화는 임란 후에 생겨났어요”무덤 수십 기의 발굴에 참여, 말할 수 없는 악취 속에서 이장 인부들과 싸워가며 거기서 나온 수천점의 의상을 연구한 박 소장은 “임진왜란은 의상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 전체가 굉장히 많이 달라진 결정적 계기였다”고 설명한다.


“임란 전만 해도 조선사회는 굉장히 살기 좋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녀의 복식은 모두 다 크고 넓었어요. 양반은 더 크고 넓게 지어 입었고, 장식성이 강해 금직을 넣어 짠 천으로 만든 옷도 흔했습니다. 전쟁 후 옷이 작아지기 시작했죠. 조선 후기에는 기녀들이 패션 리더 역할을 하면서 저고리가 올라갔는데 이를 사대부 양반 부인들도 따라하면서 일대 유행이 됐음도 다양한 출토 복식을 보고 알게 된 사실입니다”‘한국 복식과 철릭, 사대부 여성의 의상’이란 제목의 게티 세미나에서 박성실 소장은 전통 남녀의 복식을 시대적 변천에 따라 설명할 예정이다. 또한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남자’ 관련 세미나이므로 철릭에 대한 소개도 중점적으로 다뤄진다.

“미국에서 한국 복식에 대해 강의하는 것은 너무 뜻 깊은 일이라 열심히 준비해 왔다”는 박 소장은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지만 영상을 통한 유물 소개 중심으로 강연할 것”이라고 전했다.

박 소장에 따르면 여자는 치마저고리를 중심으로 한 의상이 평상복, 예복, 작업복 등 전천후 사계절 옷으로 사용돼 왔으나, 남자는 바지저고리는 속옷 역할을 했을 뿐 그 위에 다양한 포를 입었다. 외투라 할 수 있는 포는 종류가 많아서 단령, 직령, 답호, 철릭, 중치막, 도포 등이 있는데 철릭은 말 탈 때 군복처럼 입던 옷이다.

“단령 밑에 답호를 입고, 그 밑에 철릭을 입는 것이 제대로 갖춰 입은 차림이었지요. 철릭을 밑에 입는 이유는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정신무장으로, 무슨 일이 나면 겉옷만 벗고는 바로 말을 타고 달려갈 수 있는 복장이었습니다” 철릭을 보기만 해도 옷의 선과 소매 모양, 상의와 하상의 연결 위치 등에 따라 몇 세기 옷인지 알 수 있다는 박 소장은 루벤스가 그린 철릭은 1604년으로 고증된 옷과 많이 닮아 있다고 말했다.

12일 오후 1~3시 게티센터 렉처홀에서 열리는 이번 세미나에서는 남자 옷과 여자 옷을 모두 직접 시연하여 보여준다. 남자는 속옷인 고의적삼부터 철릭, 원삼까지 4벌을 입히고, 여자는 속곳에서부터 치마 둘, 저고리, 원삼까지 총 10벌을 입혀 보인다. 여자들이 더 많은 옷을 갖춰 입었던 이유는 당시 여성들의 은폐된 삶, 몸가짐을 단단히 해야 한다는 정조관념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박성실 소장은 한국 복식계 원로이며 단국대학 석주선기념박물관 관장이었던 고 석주선 여사의 가까운 인척으로 “집안 분위기에 따라 운명처럼 복식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석주선 관장을 따라다니며 늘 사진도 찍고 작업을 돕다가 아예 이 길로 들어선 것.

수도여사대를 졸업하고 세종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석주선기념박물관 연구실장을 거쳐 단국대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를 지냈고 2009년 은퇴한 후 난사 전통복식문화재연구소 소장으로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복식에 관한 8권의 저서도 출간한 그는 현재 문화재청의 문화재위원이며, 동상영정 심의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문의 (323)936-3014(전시담당 최희선)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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