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윤슬위에서

2026-04-09 (목) 12:00:00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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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hetucknee springs state park는 흐르는 강 위에서 튜빙을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다. 3월의 강가에는 플로리다 특유의 후덥지근함이 없었다.

겨울이 남기고 간 누렇게 말라버린 나뭇잎 사이로, 나무들은 연초록 잎을 하나씩 채우고 있었다. 튜브를 얕은 물가에 띄우고 올라탔다. 강으로 튜브 타러 가자는 말에 손사래를 치던 시누이 부부도, 잔잔한 물결을 보고는 선뜻 튜브 위에 몸을 실었다.

이십여 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세 남매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하나씩 들추며 웃음꽃을 피웠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남편도, 한국에서 누나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누구, 누구’ 이야기부터 벌써 중학생이 된 누나의 손자 이야기까지, 그동안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꺼내며 서로의 추억을 나누었다.


끈으로 묶인 이인용 튜브 세 개는 마치 한 몸인 듯 유유히 강물을 따라 떠내려갔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그림처럼 떠 있었고, 상큼한 바람이 한들거리며 우리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6미터 정도의 강폭 양옆으로는 무성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물가에는 잎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검은 나무들이 서 있었다.

줄기는 물속에서 바로 솟아오른 듯 곧게 뻗어 있었고, 곳곳에 부러진 창처럼 날카롭게 하늘을 향한 가지들이 있었다. 뿌리는 물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여기저기서 숨을 쉬듯 작은 기둥들을 땅 위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바람에 쓰러져 누운 통나무 위로 거북이들이 옹기종기 나와 볕을 쬐고 있었다. 크고 작은 거북이들이 눈을 껌벅이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그들을 같이 바라보다 생각난 듯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 속에서 거북이는 더 선명하게 보였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물빛과 맑은 물속에 비친 거북이의 그림자까지 고스란히 담겼다.

물가는 깊지 않은 듯, 하얀 새 한 마리가 긴 다리 중간까지 물에 잠근 채 서 있었다. 플로리다에서 흔히 보는 백로다. 자연의 일부인 양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새는 어느 순간, 꼬꾸라지듯 머리를 물속으로 박았다. 나는 새가 떨어진 줄 알고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남편이 조용히 말렸다.

‘새가 먹이를 잡는 거야.’ 천천히 고개를 드는 백로의 노란 부리 사이로 손바닥만 한 물고기가 퍼뜩 흔들렸다. 꿀꺽 삼켜지는 순간, 긴 목의 윗부분에 뿔뚝 불거짐이 보이고 그것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간다. 가엾은 물고기. 끼니를 해결한 백로는 우아한 몸짓으로 윤슬을 밟으며 물가를 거닐었다.

튜브에 몸을 맡긴 채 자연 속에 스며든 우리들의 얼굴에는 고요한 평온이 가득했다.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았음에도,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한결 가벼워졌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풍요로움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 가족이라는 느낌은, 맑은 강물 위로 흩어지는 햇살처럼 따뜻하고도 눈부셨다. 튜브를 조용히 밀어가는 잔잔한 물결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잔잔한 행복이 스며들고 있었다.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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