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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석기시대’ 협박의 역사

2026-04-07 (화) 12:00:00 이영창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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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로 돌려 놓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을 세게 때리겠다”며 쓴 표현이다. 국방부(전쟁부) 장관도 같은 말로 거들었다. 무자비한 공습을 통해 주요 시설을 남김 없이 폐허로 만들어, 문명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겠다는 얘기다. 폭탄으로 이불을 깔듯 조밀하게 맹폭하는 융단폭격 정도는 돼야, 돌조각만 남은 석기시대처럼 만들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까 생각해 보면 참 잔인한 표현이다.

■사실 이 ‘석기시대 협박’은 미국이 결정적 순간마다 종종 썼던 나름 ‘족보 있는’ 클리셰(판에 박힌 문구나 생각)다. 석기시대 멘트의 원조 격은 커티스 르메이 전 미 공군참모총장(1961~65년). 그는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신념을 가진 전략폭격 신봉자였다. 적국 군사시설 외에 도시, 공장, 철도, 공항 등 기반시설을 함께 폭격해 민간인 사상도 감수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르메이는 1945년엔 10만 명 이상이 사망한 도쿄대공습을 주도했고, 20년 후엔 북베트남 정권을 향해 “석기시대로 돌려 놓겠다”고 위협했다.

■세계가 미국의 분노를 숨죽이며 지켜보던 2001년 가을(9·11 테러)에도 석기시대 경고가 등장했다. 당시 발언자는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아미티지는 파키스탄 정보국장과의 통화에서 “대테러 전쟁에 협조하지 않으면 파키스탄을 석기시대로 만들겠다”며 협박했다. 아미티지는 부인했지만,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페르베즈 무샤라프)이 방송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밝혔다.

■미국의 석기시대 협박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미국은 9년간 북베트남을 때렸지만 끝내 철군했고, 미국의 분노에서 시작된 아프간전은 20년을 끌었다. 더구나 지금 트럼프의 말엔 과거 참모총장이나 부장관만큼의 무게감조차 없다. 동맹과 명분을 잃은 지금 미국에는 인구 9,000만 명 대국을 석기시대로 만들 시간도 능력도 없다. 이 발언도 트럼프의 기나긴 망언·허언 목록에 등재될 게 분명하다. 가장 무게감 있고 권위 있어야 할 미 대통령의 말들이 휘발성 높은 단기 소비재로 전락한 사실이 안타깝다. 듣는 이들의 피로감이 너무 크다.

<이영창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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