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설에 고향 가면 냉장고부터 여세요”… ‘텅 빈 반찬통’은 위험 신호

2026-02-05 (목) 12:00:00 변태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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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기환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설에 고향 가면 냉장고부터 여세요”… ‘텅 빈 반찬통’은 위험 신호

1월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에서 만난 변기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노년기 우울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울성모병원 제공]

한국 65세 이상 노인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40.6명(2023년 기준)이다. ‘자살 공화국’이란 오명을 쓰게 한 전체 자살률(2021년 기준 10만 명당 26명)보다 훨씬 높다. 지난달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에서 만난 변기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노년기는 가장 우울하고 동시에 자살이 가장 많은 세대지만, 65세 이상에서 나타나는 정신질환은 대중의 관심 밖에 있다”고 지적했다. ‘나이 들면 으레 그런 것’이라며 노화의 일부로 치부하는 것도 노년기 우울증의 함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년기 우울증의 특징으로 ‘기능 저하’를 꼽았다. 기분이 가라앉는 데 그치지 않고, 직업과 가사, 대인관계 등 일상생활 전반에 눈에 띄는 제약이 생긴다는 것이다. 변 교수는 “오랜만에 고향 집에 찾아갔는데 열심히 농사 지으시던 분들이 손 놓고 있는 경우,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던 부모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엌에 먼지만 쌓여 있는 경우, 즐기던 취미 활동도 접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모습 등을 기능 변화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원래 있던 고혈압과 당뇨병, 고지혈증 같은 만성 질환도 더욱 악화하게 된다.

-설에 고향 가서 부모님의 어떤 모습을 유심히 봐야 합니까.

“가장 중요한 건 변화입니다. 오랜만에 뵈었을 때, 예전과 달라진 점을 찾으세요. 첫째는 생활 환경의 변화입니다. 깔끔하신 분인데 집안 청소가 안 돼 있다거나, 요리를 즐기시던 어머니의 냉장고가 텅 비어 있거나 상한 음식이 방치돼 있다면 위험 신호입니다. 둘째는 대화 내용입니다. ‘내가 빨리 죽어야 너희가 편하지’ ‘다 내 잘못이다’ 같은 죄책감 섞인 말을 반복하시는지 보세요. 자녀들이 ‘부모님 덕에 이렇게 잘 컸잖아요’라고 정정해드려도 계속 부정적인 말씀을 하신다면 우울증 가능성이 높습니다. 셋째는 병원에 다녀도 낫지 않는 통증이 몸 곳곳에서 나타난다면 주의 깊게 봐야 해요.”


-자녀들이 부모님의 우울증을 빨리 알아차리기 왜 어렵습니까.

“젊은 사람들은 ‘슬프다’ ‘우울하다’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노인, 특히 남성 어르신은 감정 표현하는 것을 꺼리는 문화에서 살아오셨어요. 그래서 마음의 고통이 ‘신체화’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화가 안 된다’ ‘머리가 아프다’ ‘가슴이 답답하다’처럼 몸이 아프다고 호소를 하세요. 내과나 신경과 진료를 봐도 검사에선 큰 문제가 없거든요. 이때 단순 노화 때문이라고 치부할 게 아니라, 신체검사에서 원인이 발견되지 않는 통증이 지속된다면 우울증을 강하게 의심해 봐야 합니다.”

-노년기 우울증은 어떤 기준으로 진단합니까.

“미국정신의학회 기준(DSM-5)에 따르면 우울한 기분이나 흥미·즐거움을 못 느끼는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되면서, 아홉 가지 증상 중 다섯 가지 이상이 2주 이상 계속될 때 주요우울장애로 진단해요. 그 아홉 가지는 △거의 하루 종일 지속되는 우울한 기분 △대부분의 활동에 대한 흥미나 즐거움의 현저한 감소 △체중의 뚜렷한 변화 혹은 식욕 변화 △불면 혹은 과수면 △정신운동성 초조 또는 지체 △피로감 혹은 에너지 저하 △무가치감이나 과도한 죄책감 △사고력·집중력 저하, 우유부단함 △죽음에 대한 반복적 사고, 자살 사고 또는 시도입니다.”

-고령층의 자살률이 높습니다.

“노인은 젊은층에 비해 ‘실행력’이 강해요. 젊은층은 자살 생각을 하더라도 실제 시도로 이어지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반면, 노인은 치명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무망감, 계속되는 신체 통증,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고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사별 후 상실감이나 ‘자식들에게 짐 되기 싫다’는 죄책감이 방아쇠가 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취미나 봉사활동 등 사회적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우울증에 따른 인지기능 저하와 치매는 어떻게 다릅니까.

“무 자르듯 구분할 수는 없고, 보통 인지기능 저하가 있으면 우울증으로 인한 변화와 퇴행성 변화가 모두 있다고 봐야 해요. 실제 발생하는 생물학적 기전도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어느 쪽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느냐인데, 우울증 환자의 경우 인지검사 결과보다 과하게 생활 기능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요. 실제 검사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은데, 언어·판단·대인관계 등이 확 떨어집니다. 반면 인지기능 검사에서 관찰된 것과 보호자에게 들은 내용이 비슷하면 퇴행성에 좀 더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변태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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