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대학원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물었다. “잘 팔리는 그림이 좋은 그림 아닌가요?” 훅 들어온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대중의 선호와 시장, 예술적 가치의 관계를 설명하며 그날 수업을 마무리했다.
시간이 지난 뒤 정반대의 장면을 마주쳤다. 한 갤러리에서 전시된 그림의 가격을 물었더니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심지어 “그림을 꼭 팔아야 하나요”라고 되묻는 것이다. 하나는 지나치게 시장 중심적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을 밀어내는 듯 보인다.
그러나 두 발언은 사실 같은 틈에서 나온다. 예술과 대중성, 가치와 가격 사이에 존재해온 오래된 긴장이다. 가격은 시장이 즉각적으로 보내는 신호인 반면 가치는 제도와 비평·시간이 함께 검증하는 ‘지연된 결과’에 가깝다. 주식시장처럼 예술에서도 가격과 가치는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긴장은 예술사 전반에서 발견된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오늘날 근대 영어의 기준으로 평가되지만 16세기 당대에는 고급 문체라기보다 저잣거리 말에 가까웠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또한 생동감은 있으나 당시 기준에서는 비정통으로 여겨져 시비가 벌어졌다. 대중의 언어가 표준말이 되기까지는 사회 문화의 변화와 권위의 이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술가 개개인도 입장은 갈렸다. 버지니아 울프는 서머싯 몸의 작품이 읽기는 쉽지만 예술적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했다. 반면 몸은 울프의 실험성을 인정하면서도 예술이 독자와의 소통을 포기할 때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 있다고 봤다. 논쟁은 반복되지만 핵심은 하나다. 대중성과 예술적 모험 사이의 긴장이다.
미술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영국 화가 L S 라우리는 산업도시의 노동자와 공장 풍경을 단순화된 인물과 반복적인 구도로 그렸다.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평면적이고 유치하며 지나치게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됐다.
2013년 테이트 브리튼의 대규모 전시 당시에도 일부 평론가들은 미술관의 권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단순함과 반복성은 오히려 재평가의 근거가 됐다.
도시 대중의 삶을 외면하지 않은 시선이 라우리를 20세기 초 영국 사회의 증언자로 만들었다.
대중성과 가치의 관계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례는 1994년 코마르와 멜라미드의 프로젝트 ‘대부분의 미국인이 원하는 그림’이다. 이들은 설문 조사를 통해 선호하는 색과 소재·구도를 종합해 작품을 제작했다.
조지 워싱턴, 잔잔한 호수, 사슴이 등장하는 결과물은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었지만 동시에 공허했다. 작가가 “자유를 찾으려다 노예 상태를 발견했다”고 말하듯, 이는 대중의 취향이 평균값으로 환원될 때 예술이 무엇을 잃는지 보여준다. 대중성 자체의 실패라기보다 취향을 단순화한 방식의 한계를 드러낸 사례다.
가격을 단순한 착시로만 볼 수는 없다. 시장가격은 충동이 아니라 수많은 선택과 기대, 위험 감수가 축적된 집단적 판단의 흔적이기도 하다. 인상파와 팝아트 초기가 그랬다. 하지만 오늘날 소셜미디어와 신진 작가 투자 붐은 이 과정을 전례 없이 가속화했다.
작품은 완성 전에 거래되고 평가는 숙성 전에 가격이 되며 예술은 시장 흐름에 먼저 반응하도록 요구받는다. 시장은 빠르고 예술의 가치 평가는 느리다. 하지만 바로 이 긴장 위에서 예술은 가격을 넘어 가치로, 시장을 넘어 시간 속으로 살아남아왔다. 지금 우리는 가격과 가치 사이 어디쯤 있을까.
<
전승보 경기도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