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요에세이] 살리나스에서 만난 스타인백

2025-10-15 (수) 12:00:00 이현숙 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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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집 앞에 섰다. 캘리포니아 살리나스의 고요한 거리 한켠, ‘스타인벡 하우스’라는 간판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인다.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존 스타인벡이 태어나고 자라며, 그의 문학적 뿌리를 형성한 장소다. 『에덴의 동쪽』에 묘사된 “하얀 울타리 속 잔디밭으로 둘러싸여 크지만 허세 없는 집” 그대로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현관 앞 계단은 팔을 벌려 환영하는 듯하다. 고깔 지붕과 타원형 구조물, 길게 뻗은 프렌치 창이 어우러져 퀸 앤(Queen Anne) 양식의 섬세함을 드러낸다. 나무문을 두드리자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의 아버지 존 스타인벡은 제분소를 관리하고 카운티 회계관으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어머니 올리브 해밀턴 스타인벡은 교사로서 교육과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녔다. 이야기의 힘을 믿은 어머니와 현실을 직시한 아버지, 그 두 세계가 그의 문학적 시선을 길러냈다.집 안 왼쪽 방은 그가 태어난 곳이다. 벽에는 어린 시절의 사진이 걸려 있다. 유난히 큰 귀와 또렷한 눈매의 소년, 가족들은 그를 ‘생쥐’라 불렀다. 그는 이후 인간의 나약함과 강인함을 교차하며 그려내는 작가로 성장했다.


거실은 지금 ‘밸리 길드’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지역 농산물로 만든 음식을 제공하며, 자원봉사자들이 손님을 맞는다. 벽에는 스타인벡의 가족 사진이 걸려 있다. 친가보다 외가의 사진이 많다. 그의 외가인 해밀턴 가문은 아일랜드계 이민자로, 『에덴의 동쪽』의 해밀턴 집안 모델이다. 스타인벡은 외가의 개척정신과 인간애를 통해 현실 속의 선과 악, 인간의 존엄을 배우며 자랐다.

작가의 삶에서 어머니는 그에게 독서의 즐거움과 언어의 힘을 알려주었다. 강한 여성상은 어머니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그는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와 『토르티야 플랫』을 집필했다. “우울한 안개의 처음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두껍고 끝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싸우고 있다”는 『붉은 망아지』의 한 구절이 그때의 심정을 전한다.

2층 다락방은 그가 작가의 꿈을 키운 공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이곳에서 시와 이야기를 썼다. 작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살리나스 들판과 산타루치아 산맥은 그의 감수성을 길러주었다. 『붉은 망아지』, 『생쥐와 인간』, 『분노의 포도』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농장과 노동자들의 삶이 바로 그 풍경 속에서 태어났다.

그가 창문 너머로 바라보던 산은 여전히 묵묵하다. 『에덴의 동쪽』에 “저 산은 어둡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낯설고 무서운”이라 묘사된 산타루치아 산맥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운명과 구원의 상징처럼, 산은 그의 문학 속에서 반복된다. 나는 그의 의자에 앉아 그 산을 바라본다. 나에게는 너무 멀고도 가까운 거리다.

지하의 차고는 지금 ‘더 베스트 셀러’라는 기념품 가게로 바뀌었다. 유품과 함께 어린 시절 쓰던 의자, 침대 헤드보드가 전시되어 있다. 나무통 속엔 블랙윙(Blackwing 602) 연필이 몇 다스 흩어져 있다. 하루에 수백 자루의 연필을 깎아가며 글을 썼다는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모든 인간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 ‘집을 향한 여정’이다.”

나도 그를 따라, 이 길의 끝에서 잠시 멈춰 선다.

<이현숙 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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