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촌 곳곳에 들불처럼 번진 시위…청년들, 불평등·기득권층 부조리에 공분
▶ 특별한 리더 없이 SNS 통해 의기투합…6년 전 반정부 집회도 연상시켜
▶ 2018년 만든 美 ‘20대 반란’ 시나리오에도 눈길…”2025년 소요 사태 가능성 상정”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정부 규탄 구호 외치는 페루 청년[로이터]
어느 한 국가나 대륙에 국한되지 않은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최근 몇 주간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서구 사회의 근본 가치를 뒤흔든 1960년대 저항의 물결과 독재 청산을 외친 1980년대 아시아와 동유럽의 '피플 파워'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2025년의 동시다발적 봉기는 '뚜렷한 리더 없는 Z세대(1990년대 중후반∼2000년대 초반생)의 반기'라는 성격을 띠면서, 앞선 시대의 대규모 시위와 구별되는 특징을 보인다.
경제적 불평등, 기득권의 부정과 부패, 높은 실업률 등으로 촉발된 것으로 분석되는 작금의 시위에서는 특히 투쟁 현장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애니메이션 속 해적 깃발'이 살벌한 문구의 표어를 대체하는 연대와 결기의 상징물처럼 떠오르면서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 경제난 속 Z세대 건드린 특권층 호의호식
지난 8월 말과 9월 초 네팔 주요 소셜미디어에는 소수의 젊은이가 최고급 호텔에서 명품을 과시하는 듯한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너희의 사치, 우리의 고통!"과 같은 분노 어린 메시지가 등장했다.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 세계 150위권(1천450달러·200만원 상당)의 이 나라에서 특권층을 향한 수많은 청년의 반발 심리를 담은 관련 게시물에 네팔 정부는 '가짜 뉴스'라며 소셜미디어 플랫폼 26개의 접속을 차단했다.
전직 총리 아내를 비롯한 70여명 사망, 대통령 관저 방화, 장관 집단 구타로 이어지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의 도화선이었다.
청년들이 주도한 이 집단 행위는 'Z세대 시위'로 불린다.
최근 몇 주 새 Z세대를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는 네팔에서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필리핀, 케냐, 마다가스카르, 파라과이, 페루, 아르헨티나 등 유럽·아시아·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그 양태도 매우 격렬한데, 예컨대 모로코에서는 청년들이 2030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공동 개최와 아프리카 네이션스 컵 유치에 재정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거리로 나섰다가 경찰과 충돌하면서, 1일(현지시간) 기준 300명 가까운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는 Z세대 시위는 경제적 양극화, 기득권의 만성적 부패, 고용 불안정과 실업률 증가 등에 따른 누적된 불만이 그 동력으로 지목된다.
경제난 속에서 오직 엘리트만 번영하는 듯한 현실에 대한 좌절감, 권력층의 사리사욕에 대한 공분, 극소수 기득권 자녀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에 대한 환멸 등이 국경을 초월한 시위를 관통하고 있다는 뜻이다.
청년층 교육 수준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 사회에 대한 현실 인식이 뚜렷해졌다는 점도, 현 상황에 대한 분노를 키운 원인으로 읽힌다.
이는 2019년 청년층 주도의 반정부 시위와도 어느 정도 닮았다.
레바논, 홍콩, 칠레, 레바논, 이라크, 영국, 프랑스, 카자흐스탄, 파키스탄 등지에서 일어난 당시 시위에서는 대개 10대 후반∼20대 초반이 불평등과 부조리에 반발하며 권력 계층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였는데, 이들 역시 텔레그램 같은 메신저를 통해 소통하며 사회적 연대 분위기를 확산한 바 있다.
자기 편의 목소리를 유난히 도드라지게 하고, 반대편 목소리는 잠재우는 효과를 내는 소셜미디어에 기대 기득권에서 '약자'를 외면한다고 느끼게 된 사람들도 시위에 합류하며 힘을 보탠 것도 주목받았다.
◇ 애니메이션 해적 깃발 들고 궐기
올해 Z세대 시위를 대변하는 특징적 이미지는 의외의 지점에서 발견된다.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나오는 밀짚모자를 쓴 해골 모양의 깃발이 그것이다.
'원피스'는 일본 만화가 오다 에이치로가 1997년부터 주간 소년점프에 연재하고 있는 만화다. 주인공 몽키 D. 루피가 동료 '밀짚모자 해적단'과 함께 보물 '원피스'를 찾아 모험하며 불의에 저항하고 자유를 갈구한다는 게 대체적인 줄거리다.
이 만화는 단행본으로도 출간돼 전 세계에서 5억 만부 이상 판매될 정도로 인기 있다. 해골 모양 깃발은 밀짚모자 해적단의 트레이드 마크다.
원피스 팬들에게 해적 깃발은 주인공 루피의 이상향을 상징하는데, 현실 세계에는 청년 주도 시위운동의 상징물이 됐다고 미 CNN방송은 전했다.
기성세대와의 차별점을 부각하는 동시에 저항과 공감을 뜻하는 표식으로써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 이 깃발은 아시아 국가뿐만 아니라 남미에서의 Z세대 시위에서도 어김없이 나부꼈다.
인도네시아 담벼락과 길바닥에는 해적 깃발 디자인의 그라피티가 곳곳을 메우기도 했다.
누리안티 잘리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CNN에 "이 상징들은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며 "국경을 넘어 유사한 분노를 공유하는 젊은이들을 결집한다"라고 설명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온전한 디지털 세대'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Z세대 시위가 광범위하게 보급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무기로 대중적 시위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위자들은 인공지능(AI) 기술로 생성한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을 비롯해 인터넷 속어와 조롱 섞인 메시지 등을 활용해 권력자를 깔아뭉갤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시위 조직 자체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고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짚었다.
지난 달 28일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에서 펼쳐진 Z세대 주도 반정부 시위에서도 한 참가자는 "그간 소셜미디어를 통해 서로 뜻을 공유하다가 자발적으로 이곳에 나왔다"면서, '시위 지도자'를 "나와 내 옆에 있는 친구, 저기에 있는 누군가"라고 말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 '2025년 Z세대 반란' 7년 전 美시나리오 새삼 주목
이런 가운데 미 국방부가 2018년 만든 것으로 알려진 'Z세대의 반란' 워게임 시나리오에도 눈길이 쏠린다.
지난 2020년 온라인매체 더 인터셉트의 정보공개 청구와 보도를 계기로 공개된 관련 문서 내용에 따르면 미 국방부는 사회적 불만에 가득 찬 Z세대 중심의 소요 사태를 상정한 대응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미 국방부는 Z세대 중에 '2001년 9·11테러를 보면서 심리적 상처를 입었고, 2008년 금융위기를 성인쯤에 겪으면서 대학 등록금 때문에 진 빚을 갚느라 허덕이는, 정신적 충격이 큰' 무리가 있을 것으로 봤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난을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Z 반란'이 벌어지는데, 이 운동 동참자들은 다크웹(불법 웹사이트)에서 지령을 주고받거나 기득권 부정행위를 폭로하고 온오프라인에서 자신들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글로벌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으로 시나리오는 묘사했다.
또 기득권을 감싸는 대기업, 금융기관, 시민단체 등의 자금을 빼돌린 뒤 가상화폐로 세탁해 다수와 나누는 '로빈후드' 방식의 옹호 여론 확산에도 나설 것으로 미 국방부는 가정했다.
이 시나리오상의 소요 사태 발생 시점은 공교롭게도 2025년이다.
미 당국에서 7년 뒤 상황을 예견했다는 근거는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할 수 있으나, 경제난과 권력층 부패 등에 대한 Z세대의 불만이 이맘때쯤 임계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견해는 시나리오 작성 당시에도 설득력을 가졌던 것으로 관측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