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대진영 적대시, 협상 여지 좁혀…내년 선거 앞두고 강경노선 대립
▶ 쟁점 ‘오바마 케어’, 지지층 간 이해 엇갈려…타협점 찾기 쉽지 않을듯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2기 첫해부터 연방정부의 일부 기능이 일시 정지되는 '셧다운' 사태를 맞은 데는 극단적 정치 갈등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통합' 정신은 옅어지고 '분열'이 깊게 뿌리내린 미국의 정치 풍토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더욱 가팔라진 정치권의 대치 전선은 이번 사태의 장기화, 또는 유사 사례의 재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1일부로 현실화한 연방정부 셧다운을 앞두고 미 정치권은 파국을 막기 위해 한때 머리를 맞대기도 했지만, 마주 달린 열차처럼 충돌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상대방에 비난의 화살을 겨눴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전날 의사당 내 자신의 집무실에 화면을 띄워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 하킴 제프리스 하원 원내대표 등 민주당 유력 인사들이 과거 셧다운에 반대했던 발언을 반복 재생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 하에서는 그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달라졌다"는 자막을 띄웠다. 민주당이 트럼프 행정부의 '발목'을 잡기 위해 기존의 입장을 뒤집었다는 주장인 셈이다.
민주당 슈머 원내대표는 본회의장에서 "공화당은 자정까지 이 위기를 해결하고 정부를 계속 열어두기 위해 진지하게 (협상에) 임해야 하지만,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치 라라랜드(공상 속)에 있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슈머 원내대표는 셧다운 사태의 쟁점이 된 '오바마 케어'(ACA) 보조금 지급이 올해 말 예정대로 종료되고 공화당 주도로 삭감한 메디케어 예산이 복구되지 않으면 보건의료에 "위기"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화·민주당이 전날 자정 회계연도 종료까지 연방정부 가동을 위한 임시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하고 셧다운을 초래한 직접적 배경은 민주당이 문제삼은 ACA 보조금 지급 연장, 메디케어 예산 삭감 복구 등 보건복지 문제였다.
민주당은 이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중·저소득층을 중심으로 400만명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2천만명의 보험료가 인상되며, 10년 안에 1천만명이 추가로 무보험자가 된다는 점을 들어 예산안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공화당은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확대된 ACA 보조금 지급과 메디케어 예산 지원으로 수천억달러에서 많게는 1조달러 넘는 재원이 낭비되며, 수혜자 중 불법이민자를 지원하는 데 미국인의 세금이 쓰여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 같은 보건복지 이슈를 둘러싼 대립만으로 이번 사태가 촉발됐다고 진단하기는 어렵다. 근저에는 이념 대결에 토대를 둔 두 진영의 적대, 그리고 내년 중간선거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강경 노선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대적 이민자 단속, 정치적 유불리에 따른 선거구 조정과 주요 도시의 군 병력 투입, 찰리 커크 암살 등 정치적 폭력, 그리고 표면화한 정치 보복 논란 등으로 양당은 사사건건 충돌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자 단속과 감세를 공약으로 내세워 재선된 만큼, 이를 구현하기 위해 일방통행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ACA 보조금 지급 종료 역시 그가 '크고 아름다운 하나의 법안'으로 부른 감세 법안의 의회 통과에 따른 것이다.
이에 맞서 민주당은 상원 통과에 자신들의 협조가 필수적인 예산안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폭주'를 견제하겠다고 여러차례 별러왔다. 결국 이번 셧다운 사태는 양측의 극단적 정치갈등이 예고한 결말로 볼 수 있다.
물론 셧다운이 처음은 아니다. 미국에선 지난 50년간 21차례 발생했다. 짧게는 수 시간에서 길게는 한 달을 넘기기도 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인 2018년 12월 22일부터 2019년 1월 25일까지 35일간의 셧다운이 최근·최장 사례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는 예산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 거부권을 행사한 이후 셧다운 상황에 직면했다.
공화당이 야당이던 시절 이뤄진 셧다운 사례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클린턴 정부 시절 두 차례(1995년 11월 14∼19일, 12월 16일∼1996년 1월 6일) 셧다운이었다.
당시는 지금과 정반대의 구도였다. 클린턴 대통령이 메디케어 등 사회보장 지출을 줄이지 않으려 하자 야당이던 공화당은 '작은 정부, 균형 예산, 지출 삭감'을 내세워 예산안을 수용하지 않았고, 셧다운으로 이어졌다.
셧다운을 주도했던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이날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이번 셧다운을 두고 "미국인은 셧다운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지출을 늘리기 위한 셧다운 전략이 정치적 역풍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셧다운은 미 정치사의 단골 소재지만, 이번 사태는 과거 어느 때보다 풀기 어렵고, 반복되기 쉬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ACA의 경우 양당 지지층의 이해관계가 갈리는 복합적 요인을 담고 있는 데다, 상대를 존중하기보다는 적으로 여기는 환경 속에 정치적 셈법이 더해지면서 협상이 설 자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인 대화와 양보, 타협이 자취를 감춘 곳에 남은 것은 상대를 향한 조롱과 멸시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셧다운 방지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29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딥페이크로 만든 듯한 동영상을 올렸다.
민주당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와 하킴 제프리스 하원 원내대표가 당일 백악관에서 자신과 셧다운 방지 협상을 끝낸 뒤 기자들과 질의응답하는 모습이었다.
제프리스 원내대표에는 멕시코풍 전통모자와 콧수염을 덧붙였고, 슈머 원내대표에는 "불법 이민자에게 무료 의료 혜택을 주겠다"는 인공지능(AI) 합성 음성을 입혔다.
이에 대한 제프리스 원내대표의 반응은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트럼프 대통령과 미성년자 성착취범이었던 고(故) 제프리 엡스타인이 웃으며 함께 서 있는 사진을 게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건 진짜(This is real)"라고 적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을 비꼰 동영상은 가짜인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엡스타인 의혹'은 진짜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