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뉴욕의 직장을 겨우 2년 만에 팽개치고 돌아왔던 해였다. 그 짧은 경험으로 자기 사업을 한다고 나서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황당했다. 말린다고 말려질 상황이 아닌지라 목울대를 밀어 올리는 울화를 삼키고 또 삼켰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이런 시점에서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모른 척했는데. 이제와서 돌아보니 잘한 짓(?)인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베이비부머 세대란 말만 익숙했지 X세대, Y(밀레니얼)세대, Z세대, MZ세대라는 단어는 없었다. 부모의 바램이나 조언이 자식에게 약간은 수용되는 시대였는데. 그로부터 15여 년이 지난 요즈음은 각 세대가 명확히 구별되어 생활방식과 생각의 간극 차이가 얼마나 큰지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내 생각이나 조언이 과연 MZ 세대인 아들에게 맞는 건지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나는 학업을 마치면 한 직장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줄 알았고 가족이 삶의 가장 큰 울타리였다. 편지와 유선전화가 전부였던 시절, 소통은 느렸지만 기다림 속에 마음이 무르익기도 했다. 반면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세계와 실시간 연결된 디지털 네이티브다. 인간관계는 나이보다 취향과 관심사로 엮이고 일은 생계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의미와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삶의 모든 방식이 우리와는 다르니 여가, 소비, 삶의 태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안정’이라 부르는 것을 아들은 ‘답답함’이라 하고, 내가 ‘위험’이라 여기는 것을 그는 ‘도전’이라 부른다.
돌아보면 세대 간의 불만은 인류의 오래된 습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은이들은 모든 것을 안다고 믿고, 언제나 확신에 차 있다’고 했고, 키케로는 ‘오 시대여, 오 풍속이여!’라고 젊은이의 세상을 탄식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기성세대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불안함이나 불만이 전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기성세대가 불안해한 파격과 실험이 새 세대에게는 새로운 규범과 문화가 되지 않았나. 예절이 없다고 꾸짖었던 신세대의 태도는 독창성으로, 지나치다고 여겼던 그들의 확신은 개척 정신으로 남았다.
나는 이제, 아들의 방식이 낯설다고 불만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시대의 정신과 미래의 방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한다. 세대의 다름은 벽이 아니라 다리가 될 수 있다. 그 다리를 건너는 일은 때로 두렵고 서툴지만 건너지 않으면 서로의 세계는 평행선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기기와 기술에 익숙해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의 기능을 익히고 온라인 소통 방식을 이해하며,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 ‘배우고 적응하는 것’은 더 이상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무성한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단풍으로 물들 듯, 세대의 차이도 결국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해결된다. 아들의 세계는 빠르며 가볍고 나의 세계는 느리고 묵직하지만 속도가 다르다고, 무게가 다르다고 함께 걸을 수 없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서로의 보폭을 맞추려는 마음일 게다.
나는 오늘 아들이 건너가는 다리 위에 조심스럽게 발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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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희 소설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