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은 지금] 공동체 생존의 해법, 커뮤니티센터에 있다

2025-08-20 (수) 12:00:00 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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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는 끊임없는 이동과 정착의 이야기다. 부족과 민족, 국경을 넘나든 이주자들은 때로 주인이 없는 땅에 터를 잡았고, 때로는 무력이나 제도의 힘으로 기존 민족을 추방하고 공간을 점령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인 소수 이주민들은 주류 사회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차별과 소외, 멸시를 견뎌야 했다. 피부색과 언어, 생활 방식의 차이는 여전히 극복하기 어려운 벽으로 남아 있다.

이런 현실 때문에 거의 모든 이민 집단은 내부 결속을 단단히 다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면 많은 이민자들이 본국 문화를 잃고 현지 사회에 동화되지만, 수세대에 걸쳐 독자적인 정체성과 문화를 견고히 지키는 예외적인 집단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유대인이다. 방대한 디아스포라 속에서도 언어와 신앙, 전통을 굳건히 지켜온 유대인의 공동체력은 세계 역사에 보기 드문 강력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유대인의 공동체 구축 방식은 체계적이고 전략적이다. 새로운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회당을 세우고, 이어 커뮤니티센터(Jewish Community Center)를 설립한다. 단순한 친목 모임 공간이 아니라 문화와 교육, 복지, 스포츠를 아우르는 복합 공간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에 처음 등장한 유대인 커뮤니티센터는 초기에는 이민자의 사회 정착과 미국 문화 적응을 지원하는 역할에 집중했다. 이후 유대인의 경제적,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커뮤니티센터는 집단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존하고,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심 기관으로 진화했다. 뉴욕, 시카고 등 주요 도시의 JCC들은 수천만 달러 규모의 연간 예산을 운영하며 전문 인력과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공동체의 역량을 결집한다.


JCC의 가장 독특한 점은 개방성과 다문화 포용성이다. 유대인뿐 아니라 타민족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스포츠 활동, 문화 수업, 복지 서비스 등을 공유하며 오랜 편견과 거리를 좁힌다. 이는 단순한 관용이나 친절을 넘어, 소수자가 주류 사회에서 생존하며 영향력을 넓히는 ‘현명한 전략’이다.

이와 전혀 다른 현실에 처한 한인 커뮤니티도 돌아봐야 한다. 미국 내 한인 사회는 대부분 한인회, 지역 교회, 업종별 협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친목과 권익 보호, 전통 행사에 머물러 있다. 1980~90년대 한인 스몰비즈니스가 활발할 때는 업종별 협회가 에너지원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이 기반이 무너지고 2세대는 전문직 영역으로 진출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한인회는 점차 활력을 잃고 있는 중이다.

시대가 변했다. 한인 커뮤니티도 교육, 문화, 복지, 스포츠가 통합된 ‘열린 커뮤니티센터’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존 친목단체나 이익집단에 머무르면 공동체의 생명력은 한계에 부딪힌다. 새로운 커뮤니티센터는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타민족에게도 공간을 열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함께 성장하는 터전이 돼야 한다.

더 나아가 ‘한인회’라는 좁은 명칭에서 벗어나는 것도 필수다. 유대인 커뮤니티센터처럼 정부와 재단, 민간 후원의 신뢰를 받아 규모 있는 예산을 확보해야 지속 가능성이 높아진다. 미국 내 거의 모든 한인 커뮤니티에 존재하는 한인회가 이미 지역사회의 대표성을 지녔으니, 이제 역할과 이름을 새 시대에 맞게 새롭게 정립할 때다.

여러 한인단체들과 함께 민족 공동체의 중심으로서, 지역사회와 함께 열려 있는 공간. ‘타민족과 함께 사는 삶’을 공동체의 강점으로 삼는 전략. 이것이 바로 한인 커뮤니티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공동체가 살아남고 성장하는 해법은 여기서 발견된다.

<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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