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보 두다멜은 LA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지 3년째이던 2012년 1월,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완주하는 ‘말러 프로젝트’에 도전했다. 9개 교향곡을 3주 동안 17회에 걸쳐 연주하는 마라톤 대장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였던 게, 말러교향곡은 연주시간이 가장 짧은 것이 60분이고 가장 긴 3번은 100분에 달하는 대작들이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편성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연주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에너지를 완전 소진시키는 심포니들을 거의 매일 리허설하고 연주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이에 더해 LA필은 완주를 마치자마자 베네수엘라로 날아가서 똑같은 프로젝트를 반복했으니, 두다멜이 나중에 어깨를 들어 올리지도 못할 만큼 녹초가 됐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나이 31세. 세계의 수많은 지휘자들이 말러 사이클에 도전했지만 그렇게 젊은 지휘자가 3주라는 짧은 기간에 완주한 일도, 그 긴 교향곡들을 거의 전곡 암보하여 지휘한 기록도 처음이었다. 젊어서 가능한 일이었고 ‘열정덩어리’ 천재만이 할 수 있는 도전이었다.
이후 두다멜은 매 시즌 말러교향곡을 하나씩 다시 연주하며 보완하고 재해석했다. 그러다가 2019년 봄에 1번, 8번, 9번을 한 달 간격으로 연주한 적이 있고, 이번에 다시 ‘말러 그루브’(Mahler Grooves)라는 축제를 열고 말러에 대한 열정의 불을 또 한 번 지폈다.
2월20일부터 3월9일까지 계속된 이번 페스티벌에서 두다멜은 5번과 7번, 그리고 1번의 삭제된 블루미네 악장과 10번(미완성)의 아다지오 악장을 연주하는 3개 프로그램을 소화했다.
13년 전에는 나도 그만큼 젊었던지라 9개 교향곡을 모두 쫓아다녔지만 이번에는 마지막 프로그램, 5번 심포니와 알마 말러의 가곡들을 노래하는 연주회에만 참석했다. 말러의 아내인 알마는 젊은 시절 작곡을 했었는데 그녀의 곡이 연주되기는 처음이라 호기심이 있었다. 5번과 함께 묶은 이유는 말러가 그녀를 한창 사랑하던 연애와 신혼시기에 작곡한 교향곡이기 때문일 것이다.
알마 마리아 쉰들러는 빼어난 미모에 치명적인 매력으로 20세기 초 빈의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여성이다. 화가 카를 몰의 의붓딸이며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당대 숱한 작가들의 뮤즈였다. 첫 키스를 나눈 사람이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였고, 그의 대표작 ‘키스’의 모델이 알마라는 얘기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와는 작곡을 배우면서 열애에 빠졌는데 바로 그 즈음 말러를 만나면서 그를 차버리고 말러와 결혼한다. 2023년에 LA오페라가 ‘난쟁이’(The Dwarf)라는 쳄린스키의 단막오페라를 공연한 적이 있다. 바로 키 작은 추남 쳄린스키를 ‘빈에서 가장 못생긴 사내’라 놀렸던 알마에 대한 사랑과 외모에 대한 열등감의 상처를 담아낸 오페라였다.
말러는 19세나 어린 알마에게 결혼 후에는 작곡 활동을 하지 말고 아내 역할에만 충실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나대기 좋아하고 남자들의 관심을 즐겼던 그녀는 두 딸을 낳은 후 바람을 피우게 된다. 불륜 상대는 훗날 바우하우스의 창립자로 유명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말러가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상담한 이야기는 학계에서도 유명한 케이스로 남아있다.
알마는 1911년 말러가 50세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로피우스와 재혼했는데, 얼마 못 가 시인 프란츠 베르펠과 정분이 나서 그로피우스와 이혼하고 또 다시 결혼했다. 그 사이에 화가 오스카 코코슈가와 열애에 빠져 불멸의 그림 ‘바람의 신부’가 탄생한 것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런 여성이 좋은 곡을 썼으리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알마는 많은 가곡과 피아노 소품들을 썼다고 하지만 공개적으로 연주된 적이 한 번도 없고 단지 17곡만이 훗날 출판되었다. 이번 ‘말러 그루브’에서 연주된 5개의 노래는 짧고 단순하고 서정적이지만 평범했다. 그것도 최근에 관현악곡으로 멋지게 편곡된 데다 메조소프라노 사샤 쿡(Sasha Cooke)의 훌륭한 공연 덕분에 그만큼이나마 살아났다고 본다.
말러의 5번 교향곡은 새삼 너무 아름다웠다. 그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현악기와 하프로만 연주되는 ‘아다지에토’ 악장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1968년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장에서 연주한 후 여러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왔다. 1971년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가장 아름답게 사용됐으며, 최근에는 2022년 케이트 블란쳇이 주연한 ‘타르’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도 이 음악이 등장한다. 그런데 오래전 탕웨이가 출연한 코오롱 광고에서까지 이를 남용한 것은 다소 유감스럽게 느껴진다.
아다지에토 악장은 ‘알마에 대한 말러의 사랑의 편지’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내면을 명상하는 간주곡, 세속을 벗어나 은둔하고픈 말러의 영혼,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을 바라보는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온다. 흰머리가 부쩍 는 44세의 두다멜이 공들여 느리고 비감미 넘치게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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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