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고분고분 않은 젤렌스키에 ‘격노’
▶ 광물협정 불발… 우크라 안전보장 ‘빈손’
▶ 젤렌스키 “미국에 감사” 사태 수습 나서

지난달 28일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설전을 벌이고 있다. [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쟁 종전을 위한 협상을 밀어붙이는 가운데 지난달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공개적으로 설전을 벌이면서 충돌하는, 외교 무대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광물협정에 서명하기 위해 방미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평화협정 체결시 러시아의 재침공을 막기 위한 안전 보장 조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사실상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협정을 체결하지 않을 경우 협상에서 빠지겠다고 위협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을 신뢰할 수 없다며 계속 맞서자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J.D. 밴스 부통령까지 나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고마움을 모르고 무례하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이날 파국으로 끝난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정상회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평소 예측 불가능한 성격과 친러시아 성향을 고려하더라도 매우 충격적인 것이다.
■백악관서 무슨 일이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일방적인 우크라이나 종전 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방송 카메라를 포함한 언론 앞에서 거칠게 면박했으며, 여기에 J.D. 밴스 미국 부통령까지 가세해 2대1 난타전이 벌어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압박에 굴하지 않고 러시아와 휴전하려면 재차 침공을 막을 확실한 안보 보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결국 빈손으로 백악관에서 내쫓긴 처지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열린 회담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해 “무례하다”, “고마워할줄 모른다” 등의 비난을 쏟아내면서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사실상 배제한 채 협상 중인 종전 구상에 협력하라고 거듭 압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카메라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고, 젤렌스키 대통령도 지지 않고 자기 입장을 반복해서 주장했다.
통상 정상회담에서는 서로 이견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고 외교적 수사로 부드럽게 표현하는 게 관행이지만 이날 회담은 정반대였다. 지금까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주요국 정상 모두 보복을 두려워하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찬사를 쏟아내고 갈등을 빚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정상회담은 앞부분만 언론에 공개하고 이후 오찬을 겸한 비공개 회담과 광물 협정 체결식, 공동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었지만, 공개 부분이 파행으로 끝나면서 나머지 일정은 취소됐다. CNN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핵심 참모들과 집무실에서 회의한 뒤 후속 회담을 취소하기로 결정했으며, 마코 루비오 국무부 장관과 마이크 왈츠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우크라이나 측에 메시지를 전하라고 지시했다.
■미소 짓는 푸틴트럼프와 젤렌스키 회담 파국 사태로 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최대 수혜자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등 서방세계가 분열을 거듭하면서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 주도권이 쥐게 될 것이라는 평가가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1일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이날 소셜미디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광대의 면전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진실을 말했다”며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쓰레기’라며 맹폭을 가했다. 그는 텔레그램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이 그 쓰레기 같은 인간을 때리지 않은 것은 기적적인 인내력”이라고 했다.
유럽이 우크라이나 지지 입장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미국과 우크라이나 간 갈등은 외교적으로 러시아에 유리하게 적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가디언에 따르면 크렘린궁의 의중을 잘 아는 소식통은 “푸틴 대통령이 이번 사태를 즐겼으리란 것은 명백하다”며 “이제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더 많은 요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에게 이번 회담은 전쟁 시작 이후 그 어떤 군사작전보다 커다란 승리”라고 덧붙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이후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자 수습에 나섰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정상회담 다음 날인 1일(현지시간) 오후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장문의 성명에서 “미국의 지원 덕분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며 먼저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의회의 초당적 지지, 그리고 미국 국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