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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스포츠 라이선스로 대박…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죠”

2024-11-08 (금) 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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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파워 스포츠 최대희 대표

▶ 한인 첫 ‘팀 스포츠 라이선스 비즈니스’ 시장 개척
▶금융위기 한파에 발목…10년 공백기 묵묵히 버텨
▶2020년 LA 연고팀…올해는 다저스 WS 우승 덕 봐

[인터뷰] “스포츠 라이선스로 대박…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죠”

금융위기로 인한 좌절을 겪고도 멋지게 재기한‘X-파워 스포츠’(구 초이스 마케팅)의 최대희 대표가 2024년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다저스 제품을 배경으로 그간의 사업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박상혁 기자]

‘천운(天運)’. 직역하면 하늘이 정한 운명을 의미하지만, 하늘이 작정하고 돕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뜻하기도 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늘이 내려 준 귀중한 기회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천운이 다해 모든 걸 포기했을 무렵, 다시 찾아와 준 절체절명의 기회를 움켜쥘 수 있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승승장구하던 비즈니스가 2000년대말 미국을 강타한 금융위기로 인해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한창 잘 나가가던 시절 그와 소중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조금씩 도와 줘 간신히 비즈니스 명맥을 이어가다 10여년만에 또 한번의‘대박’을 터트렸다. 한인으로는 최초로 팀 스포츠 라이선스 비즈니스를 개척한‘X-파워 스포츠’(구 초이스 마케팅) 대표 최대희(71)씨 스토리다.

“할아버지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셨고 한국에서 국회 사무총장까지 지내셨어요. 아버지가 사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었죠.”


공부를 썩 잘했던 소년 최대희는 그러나 크리스천 스쿨인 대광고 재학시절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지금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지만 한국 교회의 제도적 모습에 실망해 가출을 결심하고, 절에 들어가 6개월을 지냈다. 가족들의 간곡한 호소로 다시 돌아와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박사 학위에서 스왑밋 장사로

“공군장교로 임관해선 학교 때 배운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공군 본부의 무기판매 및 수입 부서에 배치돼 미군들을 상대했습니다.”

전역 후 청년 최대희는 서울의 한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나서 교수의 꿈을 키웠다. 1985년 아내, 어린 두 아들과 함께 LA로 ‘늦깍이’ 박사과정 유학길에 올랐다.

잘 나가던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 간신히 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 시작한 유학생활이었다. 1학기를 마치자 가지고 온 돈이 다 떨어졌다.

가족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간당 4달러 최저임금을 받고 UCLA 앞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아웃도어 스왑밋을 찾아 다니며 T셔츠와 장난감 등을 팔았다. 평생 공부만하던 가장 최대희는 자신이 생각보다 장사 수완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박사과정을 중단한 아쉬움에 장사 틈틈히 캘스테이트 대학원에서 야간 과정의 MBA를 밟았다.

팀 스포츠 라이선스에 눈떠


“1980년대 중반 지금의 나이키 전신인 ‘스포츠 스페셜티스’라는 회사가 야구, 농구, 미식축구 등 프로팀의 옷과 모자, 액세서리 등을 취급하는 팀 라이선스 비즈니스를 선도하고 있었죠.”

1987년 시장 가능성을 간파한 장사꾼 최대희는 무턱대고 회사 CEO를 찾아가 자신이 공들여 만든 비즈니스 플랜을 보여 주었다. CEO는 아시안을 비롯한 소수계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디스트리뷰터(distributor) 권한을 주겠다고 했지만 돈이 있을리 없었다.

일단 샘플 제품 300달러 어치를 구입해 스왑밋 등지를 돌며 물건을 팔았다. 며칠도 안돼 물건을 완판한 최대희의 능력을 본 스포츠 스페셜티스 CEO가 선뜻 5만달러를 빌려 줬다. 장사가 잘되면 1~2년 내에 갚는 조건이었다. “그러던 차에 1988년 LA에 연고를 둔 LA 다저스와 레이커스가 동반 우승했어요. 당시는 팀 스포츠 제품을 파는 길거리 노점상들이 많았는데 덕분에 제가 확보한 물건이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죠.”

비즈니스맨 최대희에게 하늘이 내린 천운의 기회가 처음 찾아 온 것이다. 1988년 그의 이름을 딴 ‘초이스 마케팅’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노스리지에 첫 집도 마련했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미국생활에서 ‘아메리칸 드림’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승승장구 사업, 금융위기로 풍비박산

“성공가도 질주를 가능케 했던 천운이 다한 탓이었을까요. 2008년과 2009년에 걸쳐 밀어닥친 금융위기의 한파를 결국 비켜가지 못했습니다.”

미 전국의 에드워드 극장에 팀 스포츠 제품을 판매하는 키오스크를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한 중국계 은행에서 큰 돈을 빌린 것이 화근이었다.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프로젝트 진행은 계속 지연됐고, 금리가 급등해 갚아야 할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은행과 협상을 하기도 전에 법원을 통해 차압이 들어왔다. 결국 회사는 문을 닫았고, 살고 있던 집마저 내놔야 했다.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는 극심한 스트레스 탓에 자가 면역결핍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최대희의 비즈니스를 돕던 두 아들도 제 살길을 찾아 떠났다.

“다행히 수십년 동안 거래하면서 도움을 주고 받았던 사람들이 저를 믿고 외상으로 물건을 준 덕분에 근근히 비즈니스를 이어갈 수 있었죠.”

절치부심하던 최대희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고 2012년 ‘윌리엄스 스포츠’라는 작은 소매점을 오픈했다. 나이키와 함께 팀 스포츠 라이선스 비즈니스를 양분하는 아디다스가 30만달러를 사업자금으로 지원했다. 이에 힘입어 본업인 도매 업체 ‘X-파워 스포츠’를 차렸다.

펜데믹에서 찾아 온 ‘행운’

비즈니스가 어느정도 회복될 무렵 코로나19 펜데믹이 시작됐다. 대부분의 비즈니스가 셧다운 되는 등 업주들의 시름이 깊어졌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펜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2020년 LA 다저스와 레이커스가 1988년에 이어 또다시 동반 우승을 차지했다. 두번째 천운이 최대희 대표를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올해 MLB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가 4년만에 우승컵을 탈환하면서 그의 비즈니스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최 대표가 운영하는 X-파워 스포츠는 MLB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은 다저스 저지와 모자, 액세서리를 비롯해 레이커스와 차저스 등 유명 프로팀 관련 정품 수백여종을 취급한다.

일부 제품은 자체 디자인한 것이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제품은 전체 매출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효자 상품이다.

‘신뢰의 비즈니스 이어나갈 것’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최 대표는 자신이 살아온 모든 과정을 뒤돌아 보며 실력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 그는 또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신약성경 로마서 8장의 말씀을 가장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면 돈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나에게 머무르는 존재죠. 거래 과정에서 도움을 주고 받았던 사람들과의 신뢰와 협력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나와 회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함께 선을 이룰 수 있도록 비즈니스를 운영하려 합니다.” 향후 비즈니스 성장 계획을 묻는 질문에 최 대표는 “건강이 허락할 때 그날 그날 감사하며 기쁘게 사업을 하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최대희 대표는…

그는 성공과 좌절을 두루 경험한 비즈니스맨인 동시에 한인사회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2001년 윌셔 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시작으로 2008년 북부지역을 총괄하는 지역 총재의 자리에 올랐다. 2014년부터 코리아타운 라이온스클럽(구 올림픽 라이온스클럽) 회원으로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팀 스포츠 라이선스 비즈니스라는 생소한 영역을 개척한 그의 이름이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LA 한인회 부회장, LA 평통 부회장, LA 한인축제재단 부이사장, LA 한인상의 이사 등 다양한 단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대광중고와 한국외대를 졸업한 최 대표는 동문 사랑도 남다르다. 한국외대와 대광중고 동문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두 학교 남가주동문회 이사장을 동시에 맡아 선후배들을 알뜰히 챙기고 있다.

<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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