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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요리사’도 거쳤다…‘미식의 도시’ 샌프란시스코

2024-11-04 (월)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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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슐랭스타 레스토랑 28곳
▶실리콘밸리 등 포함땐 48곳

▶ 이민자들 유입으로 시작
▶다문화 퓨전요리로 발전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샌프란시스코의 태국음식 레스토랑 킨 카오(Kin Khao). 넷플릭스 ‘흑백요리사’가 불붙인 미식에 대한 욕구를 달래고자 손님으로 찾은 식당은 현지의 맛을 즐기려 찾은 이들로 활기가 넘쳤다. 이 식당은 태국 방콕에서 나고 자란 여성 셰프 핌 테차무언비윗이 2012년 문을 연 곳으로, 2014년 처음 미슐랭 1스타를 받았다. 충분히 먹어도 1인당 100달러(약 13만8,500원)를 넘지 않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슐랭 스타를 받은 식당들 중에서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맛집으로 꼽힌다.

자리에 착석해 살펴본 메뉴판에는 팟타이처럼 대중적인 음식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카오소이(코코넛 밀크를 사용한 국수), 카오문가이(닭고기 덮밥), 라압 톳(튀긴 태국식 샐러드)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비교적 생소한 현지 음식들을 파는데도 매일 만석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는 게 신기하다”고 점원에게 이야기하자 “그게 바로 비결”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한복판에서 이런 태국 길거리 음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지 않나”라며 “음식 맛이 기호에 완전히 맞지 않을 수는 있지만 이 식당을 찾는 모두가 색다른 문화를 경험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킨 카오는 올해 미슐랭 가이드에서도 1스타를 받았다. 미슐랭 가이드는 매년 맛, 가격, 분위기, 서비스 등을 바탕으로 ‘뛰어난 식당’에 최고 별 3개를 부여한다. 별 1개는 요리가 ‘특별히’ 훌륭한 식당을 뜻한다. ‘2스타’는 요리를 맛보기 위해 멀리 찾아갈 만한 식당, 최고 등급인 ‘3스타’는 요리를 맛보기 위해 일부러 여행을 떠나도 아깝지 않은 식당을 각각 가리킨다. 샌프란시스코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은 킨 카오, 3스타 레스토랑 3곳을 포함해 총 28곳이 선정됐다. 같은 생활권에 속하는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 일대를 묶어 이르는 ‘베이 지역(Bay Area)’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총 48개 식당이 이름을 올렸다.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한 캘리포니아주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미슐랭 스타 식당(올해 기준 85곳)을 보유한 주로, 이들 중 대부분이 베이 지역에 몰려 있다. 샌프란시스코를 흔히 ‘캘리포니아의 음식 수도’라고 부르는 이유다. 최근 한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흑백요리사’에서도 샌프란시스코미슐랭 레스토랑과 인연을 맺은 셰프들이 큰 활약을 했다. 심사위원이었던 안성재 셰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모수’를 시작했고, 최종 3위로 경연을 마친 강승원 셰프(트리플스타)는 한국계 코리 리 셰프가 이끄는 3스타 레스토랑 ‘베누’ 출신이다.

단일 도시 기준으로 미국 내 최다 미슐랭 스타 식당을 보유한 곳은 뉴욕(67곳)이다. 그러나 뉴욕 인구가 샌프란시스코보다 10배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샌프란시스코의 식문화 경쟁력이 뉴욕에 못지않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인구 80만 명의 작은 도시 샌프란시스코는 어떻게 미국 대표 미식 도시가 됐을까.

샌프란시스코 음식 문화의 진화는 전체적인 도시 발전 과정과 분리해 설명하기 어렵다. 샌프란시스코에는 1850년 전후 시작된 골드러시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대규모 이민자 유입이 있었다. 그리고 각 시기의 이민자들은 다양성을 더하며 ‘다문화’로 상징되는 이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1800년대까지만 해도 샌프란시스코는 음식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1865년 창간된 지역 신문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은 1869년 한 고급 레스토랑의 신문 광고 등을 바탕으로 “당시 이 지역의 모든 요리에는 세 가지 이상의 재료가 사용되지 않았고, 고급 식당이라고 해 봤자 계란 두 개 대신 세 개가 나오는 식사를 제공할 뿐이었다”고 전했다. 최고급 호텔의 식당 메뉴판이 ‘햄과 계란 세 개’, ‘굴’, ‘구운 양고기’, ‘수프’ 등 특별한 조리법도 요구되지 않는 단순 메뉴로만 구성됐을 정도다. 다만 물밑에선 중국과 멕시코, 칠레 등 남미 국가, 유럽 등에서 금광을 찾아 건너온 이민자들이 다문화 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미국 최대 규모의 차이나타운인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기원이 된 중국인 집단 거주지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식문화가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게 된 것은 1900년대 들어서다. 직접적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도시 상당 부분을 파괴했던 1906년 대지진, 이를 뒤이은 화재였다. 도시 재건을 위해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해지면서 음식 강국인 일본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됐다. 일본인들은 샌프란시스코 중심에 주거지(리틀도쿄)를 형성했고, 이탈리아인들은 주로 어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이탈리아 음식 문화를 전파했다. 파괴된 식당들이 다시 세워지는 과정에서 대부분은 더 세련된 인테리어와 현대적 메뉴를 갖췄다. “대지진 이전의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동부나 유럽 트렌드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지진 이후 이 도시는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은 전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중국 음식, 일본 음식, 이탈리아 음식 등은 여전히 따로 노는 경향이 강했다. 오늘날 샌프란시스코 음식의 핵심은 ①신선한 지역 식재료를 활용한 ②퓨전 요리로 정리되는데, 이런 특징이 정립된 시기는 1970년 이후다. 현지에서 재배된 제철 재료를 사용한 캘리포니아 요리가 부상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여러 문화가 융합된 퓨전 요리가 유행했다고 한다.

음식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훌륭한 음식에 기꺼이 돈을 쓰겠다는 이가 많지 않았다면, 샌프란시스코의 레스토랑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특히 파인다이닝(고급 식사) 레스토랑이 성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실리콘밸리가 폭발적 성장을 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값비싼 요리를 감당할 수 있는 고소득자가 많아지면서 고급 음식을 고가에 파는 레스토랑이 유지될 수 있었고, 그 덕에 샌프란시스코는 다양한 음식이 공존하는 ‘미식 천국’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샌프란시스코의 식문화에서 한식 위상이 높아진 것 역시 실리콘밸리로 많은 한인이 이주해 온 것과 맞물려 있다는 해석이 많다. 올해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는 한식당 두 곳(쌀, 삼호원)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고, 마찬가지로 두 곳씩 등재된 일식, 태국식 레스토랑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미식 도시라는 오랜 명성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도시를 할퀸 뒤 다소 빛이 바랬다. 샌프란시스코는 팬데믹 기간 대부분 기술기업들이 원격근무로 전환하며 전국 최고 수준의 공실률을 기록했다. 이때 급락한 공실률은 여전히 더디게 회복 중이다. 손님 발길이 예전만 못하다는 뜻이다. 과거와 대비해 낮아졌다고는 하나, 지금도 전국 최고 수준인 임대료는 자영업자들에게 큰 부담이다. 여기에다 팬데믹 기간 시내 곳곳을 점령한 노숙자, 절도 등 경범죄의 증가도 이 지역에서의 식당 개업과 운영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그 결과 최근 4년 사이에만 한때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었던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식당 10곳이 문을 닫았다.

식당 운영 비용이 너무 비싸지면서 개성 있는 식당의 출현도 줄었다는 게 이 지역 요리사들의 한탄이다. 요식업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미스터 주스(Mister Jiu’s)의 브랜든 주 셰프는 “우리 지역의 회복 상태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관점을 완전히 표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에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베이커리를 운영 중인 찰스 첸도 “이제 이곳의 운영자들은 식당을 매일 꽉 차고 바쁘게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다”며 “더는 셰프들이 요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미 경제 매체 포브스는 “올해 샌프란시스코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은 28곳으로, 충분히 많았다”며 “그러나 팬데믹 직전인 2019년에는 37곳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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