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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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년 노벨상…‘죽음의 상인’이라 불린 과학자의 죄책감서 시작

2024-10-28 (월) 조원경 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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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K컬처 확산으로
▶다이너마이트 발명해 큰 재산 축적
▶유산의 98%를 노벨상 설립에 남겨
▶“가난하지만 꿈 가진 이들 돕고 싶다”

▶ ‘닥터 지바고’ 작가, 소련이 수상 막아
▶히틀러, 독에 수상 금지 명령 내리기도
▶사르트르, 제도권 반대하며 문학상 거부
▶수많은 후일담 낳으며 상의 권위 키워와
▶모두의 예상 뒤엎은 한강의 노벨문학상
▶한국 문화산업 전반의 성장으로 기대

올해 노벨상 수상이 우리 시간 14일 노벨경제학상 발표로 막을 내렸다. 노벨상 관점에서 한국인에게는 매우 뜻깊은 해였다. ‘채식주의자’를 쓴 작가 한강이 문학상 수상자로 아시아 최초의 여성이 됐다. 이후 그의 소설은 불티나게 팔렸고 온라인 서점 서버는 일시적으로 다운되는 일도 발생했다. 노벨상 특수로 한강의 작품은 100만 부 이상 판매됐다. 해외에서 번역돼 출간된 책까지 감안하면 그의 인세 수입은 엄청날 것 같다. 노벨상은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이 1895년 작성한 유언을 기린 상이다. 노벨은 1833년 10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병약했던 노벨은 발명가였던 아버지의 작업실을 놀이터처럼 드나들었다. 부친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아 불과 아홉 살의 나이에 발명을 도울 만큼 화약과 화학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큰 재산을 모았다. 다이너마이트가 상업용이나 광공업에 쓰이기도 했지만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노벨이 부를 축적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노벨상은 그의 형 루드비히 노벨의 사망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시각이 많다. 형이 죽자 프랑스의 한 신문이 실수로 알프레드 노벨의 부고 기사를 실었는데, 기사에는 알프레드를 ‘죽음의 상인’으로 표현했다. 노벨상이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알프레드의 죄책감’에서 비롯됐다는 뒷이야기가 그래서 나온다. 이런 사실에 번민하던 노벨은 20세기 들어 유럽에서 불기 시작한 국제평화운동의 확산에서 영감을 얻는다. ‘인류를 위해 공언한 이들에게 상을 준다’는 노벨상의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기획했다. 1985년 마침내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는 아마도 과학기술의 후원자로 인류가 기억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노벨은 법률가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파리의 스웨덴·노르웨이 클럽에서 4명의 증인을 앞에 두고 스스로 유언장을 작성했다. 노벨은 유산의 98%를 노벨상 설립에 남겼다.

“나의 1,000가지 아이디어 중 단 하나라도 쓸모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가난하지만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노벨이 생전에 남긴 격언을 통해 노벨상의 역사를 훑어본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관련 기관들은 매년 인류를 위해 크게 헌신한 사람에게 시상한다. 노벨 사후 5년 만인 1901년 12월 빌헬름 뢴트겐(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엑스선의 최초 발견자) 등 최초의 수상자 6인이 선정되면서 노벨상의 역사가 시작된다. 대상은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평화상의 5개 분야였다. 이에 더해 1968년 노벨경제학상이 추가됐다. 대부분의 상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수여되지만, 노벨평화상은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수여된다. 노벨평화상을 스웨덴과 이웃한 노르웨이에서 수여하게 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달리 군사력으로 외국을 침략한 역사가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평화상은 노르웨이에서 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역사가 가장 짧은 노벨경제학상은 1968년 스웨덴 국립은행이 제정했다. 1901년부터 수여된 나머지 5개 분야 상과 달리 노벨의 유언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다. 설립 이후 노벨 재단이 관리하고 있고 수상자 발표와 시상도 다른 노벨상과 같이 행해지기에 노벨상의 하나로 보면 된다.

노벨상 수상자는 금으로 된 메달과 표창장, 상금(노벨 재단의 당해 수익금에 따라 달라진다)을 받는다. 노벨상은 이미 고인이 된 경우에는 상을 주지 않는다. 수상자로 선정되고 난 후 상을 받기 전에 고인이 된 사람은 수상자로 유지되고 유족이 대리 수상한다. 공동수상 대상은 3명을 넘기지 않아야 하나, 노벨평화상은 단체나 조직에 수여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노벨상과 관련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해 본다.

첫째, 노벨상을 타의에 의해 받지 못한 인물이다. 러시아의 시인이자 작가였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956년 소설 ‘닥터 지바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전쟁과 혁명 속에서도 인간의 사랑을 잃지 않는다는 인간 존엄의 주제를 다룬 이 소설에 구(舊)소련 당국은 상을 수상하지 못하게 했다. 혁명의 잔혹함과 당시 사회상을 담은 내용이 들어있다는 이유로 정부의 입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출판사들은 출판을 거부했다. 작가동맹까지 그의 제명과 국외추방을 주장했다. 결국 그는 “조국을 떠나는 것은 내게 죽음과 같다”는 탄원서를 쓰며 노벨상을 포기했다. 훗날 그의 사후 1989년 아들이 대신 노벨상을 수상했다.

독일의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카를 폰 오시에츠키도 강압에 의해 받지 못한 경우다. 그는 193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원래 1935년 수상이 유력했으나, 나치의 무력 개입을 두려워한 노벨상위원회가 1936년에야 전년도 수상자로 소급 선정해 발표했다. 게슈타포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하던 그에게 노벨상위원회가 평화상을 수여한다고 발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격노했다. 그는 이 사건을 독일인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난하면서 모든 독일인은 노벨상 수상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수감으로 시상식에 갈 수 없었던 오시에츠키는 결국 1938년 5월 강제수용소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노벨화학상의 리하르트 쿤, 아돌프 부테난트와 생리의학상의 게르하르트 도마크 역시 히틀러의 명령 때문에 노벨상 수상을 거절해야 했다. 2010년 중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류샤오보 역시 중국 정부의 방해로 상을 받지 못했다.

둘째, 자발적으로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이들이다.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와 197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레득토 북베트남 총리가 대표적이다. 사르트르는 노벨상의 서양 편중과 문학의 제도권 편입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수상을 거부했다. 노벨상 수상에 유감을 표시한 경제학자도 있었다. 바로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이다. 수상을 거부한 것은 아니나 경제학의 과학성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인물이라 수상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누적적 인과관계’를 토대로 가난의 대물림에 국가가 개입하여야 함을 강조했다. 이전의 자유주의 경제학자와 달랐다.


노벨상과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경제학자들 사이에 ‘합리적 기대가설’로 노벨상을 탄 로버트 루카스의 사례다. 1988년 당시 시카고 대학교 교수였던 루카스는 동료 교수인 낸시 스토키와 연구 과정에서 바람을 피웠다. 이를 통해 부인과 이혼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혼 서류에 있었다. 루카스의 부인은 루카스에게 7년 이내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할 경우 상금의 반을 자신에게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루카스는 그동안의 노벨경제학상 시상식이 ‘경로잔치’였음을 상기했다. 7년 이내에 자신이 노벨상을 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흔쾌히 이에 응한 것이다. 오판이었다. 그는 정확히 7년 뒤인 1995년 환갑의 나이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결국 그는 상금의 반을 전 부인에게 지급해야만 했다.

1987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과학자 찰스 피더슨은 한국 출신 첫 수장자다. 노르웨이인 아버지와 일본 어머니를 둔 피더슨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4년 10월 부산에서 출생했다. 해양 엔지니어인 그의 아버지는 당시 영국이 관장한 부산 세관에서 일했기 때문인데, 수상 당시 그의 국적은 미국이었다. 하지만 노벨위원회는 노벨이 ‘후보자의 국적을 고려하지 말고 상을 주라’는 유지에 따라 수상자의 국적이 아닌 출생지를 기준으로 분류하면서 한국 출신 첫 수상자로 기록됐다.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사람은 다섯 명이다. 마리 퀴리는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자,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1903년 노벨물리학상은 남편 피에르 퀴리와 공동 수상했다. 미국의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은 노벨화학상과 평화상을 받았다. 존 바딘, 프레더릭 생어, 배리 샤플리스도 두 번에 걸쳐 노벨상을 받았다.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도 장편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유명한 문인이다. 그의 피에 아버지의 유산이 흐르는 셈이다. 한강 신드롬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진행 중이다.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세계로 뻗어가는 K컬처와 산업 한류를 기대해본다.

<조원경 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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