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름독서의 기쁨

2024-08-28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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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8월도 다 갔다. 여름이 다 갔다고 하기엔 아직도 더위가 한창이지만 이미 마음은 9월을 넘어 가을, 선선한 바람이 기다려지기 시작한다. 예전에 한국에선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하였지만 미국에서는 여름 휴가철을 가장 책읽기 좋은 시즌으로 꼽는다. 그러나 여름이건 가을이건 안 읽는 사람은 안 읽고, 책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든 읽는다.

올 상반기에 책을 여럿 읽었는데, 그중 여운이 길어서 여름에 다시 읽은 책들이 있다. 긴 단편이랄까, 짧은 중편 정도의 책들은 부담 없어서 두세번 읽기도 했다. 짧지만 빛나는, 가볍지만 정신을 일깨우는 몇 권을 추천해본다.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맡겨진 소녀’는 둘 다 100페이지 남짓의 얇은 책이다. 이렇게 짧은 소설이 그처럼 깊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니, 그 진동과 경이가 오래 남는다. 키건(56)은 25년간 단 4권을 썼지만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가디언), “키건은 한 세대에 한명만 나오는 작가”(더 타임스)라는 찬사를 들었다.


‘맡겨진 소녀’(2009)는 타임스 선정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에 선정되었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1)은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는데 역대 부커상 후보 중 가장 짧은 작품이었다.

문체는 쉽고 간결하고 담백하며 아름답다. 단어 하나 낭비하지 않는, 적게 말하면서 많은 말을 하는 책이다. ‘맡겨진 소녀’는 형제 많은 가난한 집에서 엄마가 또 출산하게 되자 여름 한철 먼 친척집에 보내진 아이의 성장소설이다. 부모에게 다정함이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 불평하지 않고 침묵에 길들여진 아이가 낯선 곳에서 겪는 변화, 유년의 고독과 신비가 섬세한 시선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1985년 아일랜드, 미혼모들에 대한 교회의 학대와 한 남자의 용기에 관한 책이다. 뭔가 아프고 치열하고 전투적일 거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함축된 암시와 절제 속에 이야기는 고요하게 흘러간다. 주인공은 평범한 석탄목재상인, 미혼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친절한 주인집 덕분에 반듯하게 자란 소시민이다. 추운 겨울날 수녀원으로 배달을 간 그는 창고에 맨발로 헐벗고 갇혀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눈치 챈다. 동네사람 모두가 외면하고 묵인하는 일, 그도 침묵하면 안락한 삶을 계속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는 일이다.

소설의 모티프는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이다. 가톨릭수녀원이 1922년부터 74년 동안 정부의 협조 하에 운영했던 이 시설들에서 수만명의 여성이 감금되어 폭행, 학대, 성폭력,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미혼모의 아이들은 입양됐거나 사망했다. 이 잔혹한 인권유린에 대해 아일랜드정부는 2013년에야 사과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즉시 잘못을 인정했다.

두 작품은 모두 영화화됐으며 베를린영화제에서 여러 상을 수상했다. 킬리언 머피(‘오펜하이머’)가 주연과 제작을 맡아 화제가 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오는 11월 아일랜드에서 개봉예정이며 북미지역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소설이 아닌 기록물이다.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푸르스트 강의’라는 부제 그대로다. 폴란드 작가 유제프 차프스키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39년 소련군에 잡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1만4,000여명의 폴란드군 포로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장교 79명. 이들은 영하 45도의 혹한에 매일 노동으로 녹초가 되지만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지적노동을 하기로 한다. 아무런 책도 자료도 없는 상황에서 각자 오로지 기억에만 의존하여 문학, 역사, 건축사, 군사학 등을 강의한 것이다.


저자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한다. 20세기 현대문학에서 가장 길고 어려우며 위대한 소설로 꼽히는 이 작품을 그는 기억만으로 치열하게 강의했고 그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의 노트로 훗날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덕분에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프루스트의 역작을 해설을 곁들여 엑기스만 듣게 된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수확이다.

폐허가 된 수도원의 작은 방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포로들이 졸음이 쏟아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강의에 열중한다. 하루하루 죽음을 목도하고 있었을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숭고한 의지를 가질 수 있었을까?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 동안 비참한 현실을 떠나 완전히 다른 정신세계로 이동하여 인간다움과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얼음 속을 걷다’는 독일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초크가 1974년 11월 뮌헨에서부터 파리까지 800킬로미터 넘는 길을 눈보라를 헤치며 22일 동안 걸어갔던 기이한 여정의 기록이다. 당시 그는 자신의 은사이자 독일영화의 정신적 지주였던 로테 아이스너가 위독하여 파리의 병원에 입원해있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짐을 싸던 그는 갑자기 자기가 파리까지 걸어간다면 그녀가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그때부터 걷기 시작한다.

어디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다듬어지지 않은 이상한 도보여행기, 걸어가는 동안 마주친 숱한 사람과 동물과 집과 밭과 숲의 광경들이 독특한 눈으로 묘사된다. 헤어초크는 영화계의 기인으로 꼽히는 거장으로, 자연과 인간의 광기에 관한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60편 이상 만들었다.

이 외에 피터 메일의 ‘아피 미스트랄’(프로방스에서의 일년)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올해 100주기를 맞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성’과 ‘소송’도 읽었다. 그리고 관조적 사유를 시적 영감으로 담아낸 장 그르니에의 ‘섬’은 가까이 두고 틈틈이 읽고 있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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