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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러시아를 그리워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삶과 음악

2024-08-19 (월) 김종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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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흐마니노프와 차르’ 리뷰

▶ 허시 펠더의 음악극 25일까지 브로드 스테이지서... 거장 작곡가의 생애와 음악 유니크하게 다뤄 ‘감동’

“그는 늘 러시아를 그리워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삶과 음악

라흐마니노프 역의 허쉬 펠더. [Rachmaninoff and the Tsar]

러시아가 낳은 천재 작곡가이자 버추오소 피아니스트인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1873~1943)는 한국인들과 미주 한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가들 중 한 명이다. 후기 낭만파의 거장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러시아 특유의 낭만과 서정을 가득 담아 까다롭지 않고 친숙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특히 아름다운 선율들로 이뤄진 곡들이 많은데, 상당수의 한인들에게는 영화나 광고 CF 등에서 나오는 멜로디로 익숙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 라흐마니노프의 내면적 생애와 그의 음악들을 매우 유니크한 스타일로 감명 깊게 느끼고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공연이 샌타모니카의 브로드 스테이지(The Eli & Edythe Broad Stage)에서 펼쳐지고 있다. 캐나다 출신의 유명 피아니스트이자 배우 겸 극작가인 허쉬 펠더(Hershey Felder)가 선보이는 ‘라흐마니노프와 차르(Rachmaninoff and the Tsar)'가 그것이다.

이번 공연이 매우 새로운 이유는 단순한 라흐마니노프 음악 연주회가 아니라 독백극(실제 등장 인물은 2명) 형식의 음악극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펠더는 지난 1999년 현대 미국 음악을 대표하는 천재 작곡가 중 한 명인 조지 거쉬인를 다룬 1인극을 시도해 명성을 얻은 후 거쉬인을 필두로 해서 쇼팽,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드뷔시 등에 이르기까지 서양 클래식 음악사의 가장 유명한 거장 작곡가들의 생애와 음악을 1인극 형식으로 만들어 공연을 펼쳐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가 새롭게 극작화를 선택한 음악가인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지난 2018년부터 준비를 시작한 뒤 코로나19 팬데믹을 극복하고 6년여 만에 마침내 무대에 올린 공연이 바로 ‘라흐마니노프와 차르’이다.


지난 8월7일 시작되어 8월25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라흐마니노프와 차르’ 브로드 스테이지 공연은 펠더가 전 세계적으로 LA 지역에서 첫 선을 보이는 월드 프리미어 공연이다. 필자가 브로드 스테이지를 찾은 지난 8월17일은 저녁이 아닌 낮 오후 2시 공연임에도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메워 이번 공연에 대한 LA 지역 음악 애호가들과 라흐마니노프 팬들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이번 공연은 그동안 이어져 왔던 펠더의 1인극 형식과는 조금 달리, 그 자신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펠더가 라흐마니노프 역을 맡고, 영국계 이탈리안인 조나단 실베스트리(Jonathan Silvestri)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차르)인 니콜라이 2세 역을 맡아, 라흐마니노프가 미국 시민권을 딴 후 말년을 보냈던 베벌리힐스의 자택을 배경으로, 죽음을 앞둔 라흐마니노프가 과거 러시아 시절 당시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와 그의 딸 아나스타샤와의 과거 기억들을 회상하면서 둘 간의 대화가 오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잘 알려진 대로 라흐마니노프는 19세기 말 러시아 왕실이던 로마노프 왕가의 친척이 되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 걸출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가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자, 쫓기다시피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와 정착했다. 러시아에 공산주의가 들어서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친적 귀족 가문이었던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금지되고 조국은 그에게 등을 돌린다. (물론 이후 러시아에서 라흐마니노프는 해금된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서 세계적 작곡자 겸 피아니스트로 성공하지만, 영어에 능숙함에도 자신과 관련된 모든 문서는 러시아어로 작성하는 등 마음은 항상 러시아로 향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늘 러시아를 그리워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삶과 음악

허쉬 펠더가 극 중에서 라이브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Rachmaninoff and the Tsar]

펠더의 이번 공연에서는 이러한 개인적 삶의 스토리 속에 숨겨진 라흐마니노프의 깊은 내면의 이야기들이 감동과 유머가 함께 스며든 대화극으로 펼쳐지며, 이러한 이야기들의 중간 중간에 그의 삶과 병렬되는 라흐마니노프의 걸작 음악들, 예를 들어 ‘프렐류드 C# 단조’, ‘피아노 협주곡 2번’,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18번’, 그리고 ‘보칼리제’ 등의 유명 선율들이 펠더의 라이브 피아노 연주로 펼쳐져 관객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준다.

약 1시간40분 동안 인터미션 없이 이어지는 공연의 피날레는 바로 슬프도록 아름다운 ‘보칼리제’ 연주와 선율이 흐르면서 라흐마니노프 역의 펠더가 조국을 향해 “그때 왜 나를 다시 부르지 않았나요”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며 절규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으며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펠더가 공연 후 관객들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이번 공연의 배경을 설명하고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궁금증들을 상세히 풀어준 점이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좋아하지만 그의 삶과 내면적 배경에 대해 그리 익숙지 않거나 배경 지식이 별로 없을 경우 극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지만, 펠더의 뛰어난 연기력과 피아노 연주 솜씨, 그리고 그 어느 다른 곳에서도 보기 힘든 유니크한 스타일의 공연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라흐마니노프와 차르’는 한인 음악팬들에게 오래 기억에 남을 무대가 될 것이다.

공연 웹사이트: RachAndTheTsar.com
“그는 늘 러시아를 그리워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삶과 음악

니콜라이 2세 역의 조나단 실베스트리(왼쪽)과 펠더. [Rachmaninoff and the Tsar]



<김종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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