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신조어에 담긴 한국사회 풍경
2024-07-13 (토)
홍병문 서울경제 문화부장
최근 ‘뉴진스럽다’는 표현이 화제가 됐다. 소비자가 정당한 가격을 지불했으나 이를 온전히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쓰인다. 게임 ‘배틀그라운드’ 제작사 ‘크래프톤’이 걸그룹 ‘뉴진스’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했다가 뽑기 아이템 확률 조작과 성희롱 논란에 휩싸였다. 걸그룹 뉴진스의 팬덤이 작용하면서 이 표현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온라인 백과사전 ‘나무위키’에서는 이 표현에 대한 삭제·복원 등 편집이 반복되고 있는데 표현의 정확성보다는 논란의 여파 때문이다.
K팝 아티스트와 연관된 신조어 중 유명한 것은 ‘원영적 사고’와 ‘희진적 사고’다. 안티팬들의 집중 타깃이 됐던 ‘아이브’ 멤버 장원영의 초긍정적 사고는 감동적이다. 자신이 사려던 빵이 품절되자 “앞사람이 제가 사려던 빵을 다 사가서 너무 러키(lucky)하게 제가 갓 나온 빵을 받게 됐지 뭐예요? 역시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야”라는 장원영의 발언은 미소를 짓게 한다. 딸기를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먹는다는 이유로 너무 예쁜 척한다고 한동안 악플에 시달렸던 장원영이다. 그런데 오히려 초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영어 이름 비키(Vicky)를 붙여 만든 ‘러키비키’를 유행시키고 있다.
신조어 ‘희진적 사고’는 ‘원영적 사고’의 대칭점에 서 있다. 기자회견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이름을 빌린 용어다. 민 대표는 자신을 화나게 하거나 궁지로 내모는 상대방에게 직설적으로 대항한다. “아니 내가 죽긴 왜 죽어. 누구 좋으라고 죽어. 걔네들이 죽어야지. 난 악착같이 살아야지.” 기자회견에서 쏟아진 민 대표의 어록은 ‘희진적 사고’라는 유행어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분노할 것이 많은 세상에서 ‘원영적 사고’만으로는 버틸 수 없으니 정작 필요한 것은 ‘희진적 사고’다. 우리의 삶은 긍정적 희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가끔은 분노를 터뜨리는 ‘희진적 사고’가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심리학자들의 분석도 나온다. 이런 K팝 신조어는 요즘 정치 세태와 오버랩되기도 한다. 독불장군식의 국정운영으로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윤석열 대통령, 총선 참패 이후 민심의 경고장을 받고도 크게 달라진 게 없는 여당, 압도적 의석 확보 이후 ‘이재명 1인 체제’가 된 야당을 보면서 국민들은 ‘원영적 사고’로는 해소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낀다.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출마에 나선 의원들은 막말을 쏟아내며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절대적 충성 경쟁에 나서고 있다. 당 안팎에서는 이 전 대표의 강성 지지층인 이른바 ‘개딸’을 의식한 발언이라는 말들이 쏟아진다. 이 정도면 민주당 의원 사이에서는 ‘민주적 사고’가 아닌 ‘개딸적 사고’가 주류 정신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총선에서 패배한 여당은 전통적 보수당 지지자들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초긍정 ‘원영적 사고’의 주문만 외우는 듯하다. 총선 참패를 반성하고 혁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도 쉽지 않은 형국에 당 재건을 위한 명확한 비전 대신 ‘패배 책임론’과 ‘배신자 논란’에 올인하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12주째 20%대 초중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윤 대통령은 여전히 ‘제왕적 사고’ 방식에 갇혀 있다. ‘과학계 카르텔 타파’를 명분으로 내걸었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은 비소통적 정책 결정으로 총선에서 치명타가 됐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의정 갈등 문제도 정책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소통이라는 담론의 장을 외면하면서 빛이 바래고 있다.
‘개딸적 사고’나 ‘제왕적 사고’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여기에는 ‘자신의 의견만 옳고 상대편은 그르다’는 비소통적·비경청적 태도가 깊게 뿌리내려 있다. 철학자 해나 아렌트나 위르겐 하버마스가 이상으로 생각한 공론장은 우리 정치 사회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가상공간이 돼버렸다.
소통과 대화가 없는 정치 화법은 결국 전체주의로 흐른다. 민주주의의 후퇴일 뿐이다. 대선과 총선에서 행사한 유권자의 한 표가 제 가치를 못하게 만드는 지금의 정치 상황은 뉴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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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문 서울경제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