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을 추천해줄 수 있나요?” 최근 서울의 주요 대학 총장과 담소를 나누다가 나온 얘기다. 당연히 면접 등 절차를 밟아야 하겠지만 워낙 AI 인재가 귀하다보니 교수 임용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AI·반도체 전문가인 KAIST의 K 교수에게 물어봤더니 “제자들 중 현재 AI 분야의 교수를 희망하는 학생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학 등록금이 16년째 동결되다시피 하는 바람에 교수의 연봉도 소폭 인상에 그쳐 기업과의 격차가 더 커졌다. 이렇다 보니 K 교수가 배출한 90여 명의 석박사 학위 제자 중 40명 이상이 미국 실리콘밸리 빅테크로 건너가서 근무할 정도다. K 교수는 “테슬라와 구글에 근무하는 제자 부부에게 KAIST 교수직을 권유했더니 자녀 교육의 어려움, 적은 연봉, 스톡옵션 포기 등을 들어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공계 황폐화’가 거론되는 마당에 애써 키운 AI·반도체 분야 등의 인재마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해외 빅테크들이 고급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인재 엑소더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의 최전선에서 뛸 인재들이 없으면 성장 동력 확충은 물론 국가 생존도 장담할 수 없다.
미국 빅테크에서는 명문대 석박사 출신 직원인 경우 초봉이 연간 40만 달러(약 5억 5,000만 원)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AI 소프트웨어를 해본 엔지니어는 연봉이 100만 달러(약 13억 원)를 넘는다. 미국 시카코대 폴슨연구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AI 분야 한국 석박사 출신의 약 40%가 해외로 떠났다. 실제 AI를 연구한 지인들 중 미국이나 캐나다 등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는 사례를 심심찮게 본다.
미국·일본·유럽 등이 반도체 공장 증설과 AI 반도체 개발을 가속화하면서 인재 유출 현상도 심각해지고 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부의 J 교수는 “요즘 젊은 세대는 영어 소통에 별 어려움이 없어 연봉도 많고, 경력에도 유리하고, 직장 문화가 비교적 자유로운 해외 기업들을 선호한다”고 전했다. 반면 AI 전공 유학생들이 귀국을 희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울경제신문이 2022년 가을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미 과학기술 혁신 토크 콘서트’를 개최했을 때 기자가 만났던 80~90명의 석박사 과정 유학생들 중 ‘한국에서 먼저 일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훌륭한 AI 인재에게는 제 연봉(지난해 약 23억 원)보다 더 줄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국내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조차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MS), 엔비디아, 구글, 애플 등에 맞서 AI 인재 유치전을 펴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글로벌 AI 혁신을 압도적으로 주도하는 미국·중국을 비롯해 유럽·일본·대만 등의 AI 인재 유치전도 불붙고 있다. AI가 제조, 유통·서비스, 교육, 의료, 금융, 안보 등 모든 분야에서 파괴적 혁신을 불러일으키며 일자리에도 변화의 폭풍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한국은 로봇, 자율주행, 드론, 도심항공교통(UAM) 등의 ‘행동형 AI’와 반도체 분야에서 상당한 경쟁력과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인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인재 유출이 심화하는 데다 연구개발(R&D) 예산 감소의 충격파, 데이터 활용 규제, 인프라 미비 등 많은 애로점을 갖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부가 올 4월 AI 주요 3개국(G3) 도약 목표를 제시한 것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유다.
결국 미국 실리콘밸리나 보스턴밸리처럼 각국의 인재들이 몰려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우수한 두뇌들이 모여서 초격차 기술을 개발하는 ‘한국판 실리콘밸리’를 만들려면 유능한 인물들이 살고 싶어하는 매력적인 국가로 탈바꿈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규제 혁파와 노동 개혁 등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갖춰야 한다. 또 인재 유치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을 늘리고 외국인 정주 여건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동남아시아의 소국 싱가포르에 인재들이 모이는 것도 우수 인력을 파격적으로 대우하고 상속·증여세 등도 없기 때문이다. 담대한 전환을 꾀하겠다는 의지 없이는 글로벌 혁신 생태계 구축은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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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본 서울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