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 동안 크게 세 번의 디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하락)이 출현했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의 미국,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30년 장기불황, 그리고 2020년 이후의 중국이 그 주인공이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디플레이터, 즉 경제 전체의 물가 상승률은 2023년 초 이후 1년 넘게 마이너스 행진을 벌이고 있으며 2024년 접어들어 하락폭이 더 가팔라졌다.
중국의 디플레이션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유는 물가 하락 흐름이 한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고 지속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 하락이 만성화될 때 가계는 ‘조금만 더 기다리면 값이 더 내릴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며 소비를 미룬다. 이자율의 실질적인 부담이 늘어나는 반면, 세금을 걷긴 힘들어지기 때문에 정부 부채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지출 여력이 고갈되고 국가 신인도가 떨어지며 글로벌 투자자금이 유출되는 과정에서, 주식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의 기회까지 봉쇄될 공산이 크다. 기업들의 투자도 위축되는 악순환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런 까닭에 디플레이션 초기 국면의 정책은 매우 중요하다. 이 타이밍을 놓친 다음에는 어떤 정책도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1930년대 미국의 장기불황을 구제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수백만 명의 젊은이가 군대에 징집되며 실업률이 떨어졌고, 유럽과 태평양의 전선에 공급될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재고 물가가 빠르게 소진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30년 불황은 어떻게 해결됐을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2013년부터 시작된 새로운 경제정책이 회복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이 정책의 핵심은 무제한에 가까운 통화 공급 확대를 통해, 엔화의 약세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즉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때까지 끝없이 돈을 뿌리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10년 넘게 지켜나감으로써 소비자들의 기대를 바꿔 놓는 게 목표였다.
여기에 미국과의 관계가 좋았던 것도 중요한 포인트였다. 아베노믹스가 시행된 이후, 오바마와 트럼프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가 집권했지만 모두 엔화의 약세를 지지했다. 특히 대미 무역흑자 국가에 대해 ‘관세폭탄’을 투하했던 당시 트럼프 대통령마저 일본의 아베 총리를 ‘환상적 친구’라고 부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2020년 워런 버핏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몰려들면서, 주식과 부동산 가격마저 상승한 것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주식 가격의 상승으로 금융기관들이 보유한 주식의 가치가 상승한 데다, 부동산 대출이 늘어나면서 경제 전반의 돈맥경화 현상이 풀렸기 때문이다. 자산 가격 상승 덕에 가계의 부가 늘어나고,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경제 전반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일본의 디플레이션 탈출 경험은 중국에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준다. 위안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한편 강력한 통화 공급 확대 정책을 시행하고, 외국인이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할 길을 열어주면 디플레이션 위험을 퇴치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이 이 정책을 시행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중국 정부는 달러에 대한 위안화 환율을 일정한 수준에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이 과정에서 매년 수천 억 달러 이상의 외환보유고를 소모하고 있다. 아래 <그림>은 중국의 환투기 규모 변화를 측정한 것인데, 2015년 이후 그 규모가 급격히 늘어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참고로 환투기 규모는 무역수지의 변화로 설명할 수 없는 외환보유고의 변화를 측정한 것이다. 예컨대 1,000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면 외환보유고도 비슷한 수준으로 늘어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2015년 이후 중국 외환보유고는 막대한 무역흑자에도 불구하고 3조 달러 전후에 고정돼 있다.
물론 무역수지로 설명할 수 없는 달러의 유출을 꼭 ‘환투기’로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이른바 일대일로 정책 시행으로 중국의 해외 투자가 크게 늘어난 면도 있고, 여행수지 등 서비스 수지 적자가 크게 발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만 2015~2016년에 비정상적인 외환거래가 크게 늘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실제로 카일 배스 등 세계적인 헤지펀드는 중국 위안화 가치의 폭락을 노린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 징후가 뚜렷하다.
2015년 중국 위안화 가치 하락에 베팅했던 헤지펀드의 논리는 간단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를 부양할 목적으로 너무나 많은 돈을 풀었고, 특히 은행 대출뿐 아니라 이른바 ‘그림자 금융’을 통해 돈이 풀린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즉 외부 충격에 대단히 취약한 경제가 됐고, 결국 중국 정부가 고정환율 제도를 포기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 대목에서 중국 그림자 금융의 핵심, 자산관리상품(WMP)에 대해 살펴보자. 중국 정책당국은 기업들에 자금을 몰아줄 목적으로 시장 균형 수준보다 낮게 은행 예금 및 대출 금리를 억제했다. 이 과정에서 피를 보는 것은 가계였다. 경제는 연 10% 성장하는데, 예금금리는 단 1.5%에 불과하니 재테크에 대한 갈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비은행 금융기관들은 예금금리보다 2~10% 이상 높은 수익을 제공하는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판매했고, 금융기관들은 물밀 듯 들어온 자금을 활용해 은행 창구를 이용하지 못하는 민간기업들에 돈을 빌려줬다.
금융기관만 이 일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마윈이 설립한 앤트그룹은 2019년 약 5억 명의 소비자에게 대출해줬는데, 자금의 원천은 소액의 대출증서를 모아 자산운용화증권(ABS)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10억 명 이상의 중국인이 알리페이로 결제를 하고, 온라인 쇼핑몰 타오바오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계와 기업의 신용도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게 성공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2015년 투기자본의 공격으로 큰 위기를 겪은 중국 정부 입장에서 자산관리상품이나 앤트그룹의 행태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국영은행 주도의 금융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을 방치하면 공산당의 영향력이 감퇴된다는 것도 강경대응을 가져온 원인으로 지목된다. 결국 2020년 10월 마윈 회장이 공식석상에서 국영은행 중심의 금융시스템을 ‘전당포’라고 비판했던 것, 그리고 중국 정부가 앤트그룹의 상장을 중단시키는 한편 마윈 회장의 경영권을 빼앗은 것도 이 배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2015년 환투기 공격의 트라우마, 그리고 그림자 금융 사태는 ‘중국판 아베노믹스’의 실현 가능성을 사실상 제로(0) 수준으로 낮춘다. 정책당국이 외환 및 금리 등 금융시장에 대한 통제를 놓을 생각이 없고, 특히 국영기업들이 현재와 같은 저금리 대출 없이 생존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도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다. 미국 전미경제분석국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국영기업들은 민간기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리로 대출을 받지만 경영효율성은 민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중국이 위안화 환율을 대폭 인상하는 한편, 해외 투자자들의 중국 투자를 장려하는 방향으로의 정책 전환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가장 유력한 대안은 ‘버티기’다. 최근의 물가 하락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간주하고, 대외 환경이 개선될 때까지 기업을 지원하는 것이다. 최근 중국 정부가 이구환신, 즉 오래된 가전제품이나 자동차를 바꿀 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도 이런 목적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전기차와 태양광 그리고 이차전지 생산 기업들의 내수 매출이 늘어나는 것도 중국의 국익에 부합된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 번째는 다른 나라로의 수출길이 막힐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 국영은행들이 제조업체에 낮은 금리로 대출해주고, 정부가 다양한 방법으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게 정당하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중국의 전기차 업계가 ‘제2의 내수시장’을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던 유럽연합(EU)의 태도가 바뀐 것도 이 때문이다. 만일 미국에 이어 유럽마저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높인다면, 판로가 막히며 과잉재고 문제가 부각될 수 있다. 재고가 쌓이면 기업들의 제품가격 인하 압력이 높아지며, 이는 경제 전반의 디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는 악순환에 빠져들 수 있다.
어쩌면 수출길이 막히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국가부채의 증가다. 국제통화기금은 2023년 이미 중국의 GDP 대비 국가부채가 80% 선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했다. 지방정부 부채까지 포함한다면 100% 선을 훌쩍 뛰어넘을 전망이다. 더 나아가 소득세 등 세금 대부분이 명목가치에 연동되기에, 디플레이션 발생으로 세수가 줄어드는 것도 문제다.
물론 국채 대부분을 중국의 금융기관들이 보유하고 있기에, 당장 중국 국가부채 문제가 부각될 여지는 크지 않다. 다만 앞으로 또 다른 형태의 위기가 찾아올 때 정부의 역할은 크게 제약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대외신인도가 앞으로 계속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그나마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개방된 시장인 주식시장으로의 자금 유입 가능성을 억제할 가능성이 높다.
이상의 분석은 현재 주어진 조건에 기반한 것이니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 중국 정부가 시장을 대거 개방하면서 교역 상대국에 화해의 손을 내미는 한편, 금리를 자유화해 그림자 금융을 수면 위로 올리는 정책 조합도 시행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다만 이 시나리오가 실행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1990년대 초반부터 폴 크루그먼을 비롯한 여러 경제학자가 일본 정부에 ‘강력한 통화공급 확대’ 정책을 권고했지만, 약 20년이 지난 다음에야 실현됐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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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