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네거티브 규제가 경쟁력이다

2024-04-06 (토) 김흥록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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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 여러 경제학자들은 미국 경제가 ‘와일 E 코요테의 순간(The Wile E Coyote Moment)’에 있다고 진단했다. 와일 E 코요테는 미국 애니메이션 루니 툰에 나오는 캐릭터로, 절벽을 내달리다가 아래 바닥이 없다는 걸 깨닫고 한순간 밑으로 떨어진다. 미국 경제가 예상외의 고공 행진을 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결국 고금리로 인해 미끄러질 것이라는 전망이 그만큼 많았다.

지금의 진단은 다르다. 와일 E 코요테의 순간이라고 하기에는 공중을 내달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다. 아무것도 없는 절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사실 소비력, 기업 실적, 생산성, 인공지능(AI) 등 신산업 등 여러 요인이 떠받치는 단단한 바닥일 가능성이 커졌다. 우리나라 상장 기업들의 4분기 어닝쇼크 비율은 53.4%였던 반면 같은 기간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편입 기업들은 어닝비트 비율이 74%였다.

현시점 미국의 경제 호조는 단면일 뿐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미국 경제는 지난 몇 세대에 걸쳐 대부분 강했다. 산업을 만들어내는 혁신 기업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용 컴퓨터(PC) 시대를 상징하는 마이크로소프트(MS)는 물론이고 인터넷 시대를 이끈 구글, 모바일 시대를 연 애플, 전기차를 대중화한 테슬라 모두 미국 기업이다. AI의 태동을 알린 기업들도 대부분 미국 기업들이다.


이는 미국이 혁신 기업을 배출할 수 있는 토양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가들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고 정부는 문제 가능성이 클 경우에만 개입한다. 이른바 네거티브 규제다. 사업 진출 자체를 원천 차단하기보다 시도는 인정하되 추후 규제하는 방식이다.

최근 비트코인 채굴 산업에서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는 의외로 미국이다. 2021년 초만 하더라도 비트코인 채굴 산업의 80%는 중국이 장악했지만 지금은 미국 내 채굴이 전체 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채굴을 전면 금지한 사이 미국에서 마라톤디지털홀딩스·라이엇플랫폼 등 민간기업들이 채굴 인프라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 행정부가 비트코인에 우호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자국의 거래소인 코인베이스가 불법 거래 중개를 했다고 보고 소송을 내기도 했다. 해외 거래소인 바이낸스에도 자금세탁 혐의로 소송을 냈다. 그럼에도 정부는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허용했으며 채굴 산업의 성장을 일단 지켜보고 있다. 그 결과 비트코인 산업 생태계는 신규 발행부터 유통·투자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장악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게 바로 네거티브 규제의 효과다.

우리의 규제 체계와 문화는 대부분 미국과 반대다. 명확히 허용되는 영역에서만 사업 진출이 가능하고 애매한 영역에서 시도하기는 어렵다. 4년 전 정부와 의회의 철퇴를 맞고 시장에서 물러나야 했던 ‘타다’의 사례가 우리나라 규제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타다는 운수사업법 위반 혐의로 결국 사업을 접어야 했지만 정작 대법원에서도 타다는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의회가 타다금지법을 통과시켰던 시점은 마침 지금과 같이 국회의원 총선거를 한 달 앞둔 2020년 3월이었다.

삼성과 현대차·SK·한화 등 국내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반도체와 자동차·청정에너지 등 여러 영역에서 경쟁하고 있다. 우리가 지속 성장하려면 제2의 삼성이나 현대차·SK 등이 나와야 한다. 한때 미국 경제를 이끌던 US스틸이나 IBM·엑손 등은 이후 애플이나 MS·메타와 같은 신생 기업들에 선두 주자의 배턴을 내어줬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새로운 시도가 허용되는 문화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크지 않던 20세기까지는 해야 할 일을 짚어주는 지금의 규제 방식이 효과적이었을 수 있다. 지금은 다르다. 한국은 세계 최대 경제국 중 한 곳이고 경쟁 영역도 과거와 달리 첨단을 달리고 있다. 이는 농경이나 단순 제조와 달리 변화의 폭과 속도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포지티브 규제로는 AI 등 앞으로의 시대 변화를 따라잡기 어려울 수 있다.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와일 E 코요테의 순간에 서는 곳은 바로 우리나라일 수 있다. 

<김흥록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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