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의 반 동맹주의 대처법

2024-03-15 (금)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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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헤이스팅스 이즈메이 장군은 나토 창립의 목적이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미국의 관여를 보장하며 독일의 군사적 재부상을 저지하기 위함”이라고 간결하게 정리해 말한 적이 있다. 1949년 출범한 나토는 갖은 곡절에도 이즈메이가 언급한 세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

냉전의 주요 전장은 유럽이었다. 소련은 호시탐탐 유럽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했지만 나토는 이를 막아내는 주요 기제로 작용했다. 미국은 건국 초부터 유럽의 어지러운 정황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유럽에서 터진 1차 대전에 늦게나마 참전하기는 했지만, 전후 바로 유럽의 안보 상황에 신경을 껐다. 그런데 2차 대전이 끝나고 나토를 창립한 후부터는 줄곧 유럽 안보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1~2차 대전의 전범국인 독일은 나토 출범 이후 더 이상 유럽 안보의 위협이 아니라 역내 평화에 기여하는 국가로 탈바꿈했다.

탈냉전 시기에도 잘나가던 나토에 최근 큰 시련이 찾아왔다. 첫 번째 시련은 러시아발이다. 러시아가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은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인 동시에 러시아의 팽창주의가 재발현한 사건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격적인 전면전에 허가 찔린 나토 동맹국들이 각자도생하며 지리멸렬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의 예상과 달리 나토는 공조를 강화하며 러시아의 도전에 잘 대응해왔다. 미국의 리더십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두 번째 시련은 미국발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최근 “나토라고 해도 방위비를 내지 않으면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러시아가 공격하도록 부추길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재입성한다면 나토를 탈퇴할 것이라는 분석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고 유럽 동맹국들은 미국이 손을 뗀 나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의의 잠정적 결론은 설사 미국이 떠나더라도 나토는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때문에 뭉치기 시작한 나토가 트럼프 때문에 더 똘똘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트럼프의 문제 발언이 나온 후 나토는 서른두 번째 회원국으로 스웨덴의 합류를 공식화했다. 그동안 딴지를 걸던 헝가리가 결국 동의한 것은 그만큼 위기감이 고조됐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트럼프의 불평과는 달리 유럽 동맹국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국방비를 대폭 증가해왔고 이런 추세는 더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의 협박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나토를 손절할 경우를 대비하는 모습이다. 폴란드와 발트 3국은 병력도 증강하고 있고 방위산업 투자도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의 추가적 우크라이나 지원이 난망한 상황에 유럽 동맹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영국은 4,000억 원 규모의 국방 패키지 예산안을 발표했고 덴마크는 자국의 포탄을 모두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울러 독일·프랑스·폴란드 3국이 체결한 바이마르 삼각동맹도 활성화되고 있는 조짐이다. 3국은 참혹한 전쟁의 역사로 얽히고설켜 있는 나라들이다. 3국 대표는 1991년 독일 바이마르에 모여 아픈 과거를 뒤로하고 미래를 위해 협력을 확대하자며 바이마르 동맹을 천명했다. 이후 괄목할 만한 활동이 없던 바이마르 동맹이 트럼프 발언 이후 안보 협력을 강화하자며 의기투합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트럼프의 반동맹 정책은 나토뿐 아니라 한미 동맹을 포함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동맹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아태 동맹국들도 각각 더 강해져야 한다. 아울러 동맹 간 연대를 더 강화해야 한다. 특히 한국과 일본이 역사적 악감정을 뒤로하고 동맹 연대에 앞장서야 한다. 저명한 지정학자 고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한일이 연대를 강화해야 하는 이유는 미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아시아를 떠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자유주의 국제 질서는 미국이 만들었지만 미국 것만이 아니다. 미국이 자유주의 국제 질서 수호의 임무를 방기할 때 다른 자유주의 국가들이 합심해 이를 지켜내야 한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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