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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게리와 두다멜의 ‘라인의 황금’

2024-01-24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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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필하모닉의 2023-24 시즌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개관 20주년을 기념하는 시즌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경이로운 건축물을 창조해낸 프랭크 게리(94)에게 감사를 표하는 프로그램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에사 페카 살로넨을 위시한 작곡가들이 그에게 헌정한 신곡들의 연주회는 물론, 디자인과 건축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들, 음악과 건축에 대한 살로넨과 게리의 대담 등이 잇달아 열렸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정점을 찍은 것이 지난 주말 나흘간 열린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공연이다.

어렵기로 유명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링 사이클’ 1편을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했고, 그 무대와 세트를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했다. 디즈니 홀은 오페라하우스가 아니라 콘서트홀이기 때문에 오페라 공연에는 제약이 많지만 게리는 자신이 지은 공간을 스마트하게 이용해 독창적인 풀 스테이지 오페라 무대로 재창조했다.

그는 애초에 이 콘서트홀을 지을 때 음악공연뿐 아니라 춤이나 오페라, 기타 무대공연이 가능하도록 공간을 넓히고 줄이고 분할하고 변형하는 기능을 설치했다. 이 기능 때문에 지난 15년 동안 두다멜은 디즈니 홀에서 수많은 야심찬 공연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역시 프랭크 게리가 참여한 2012~14년의 ‘모차르트/다폰테 3부작’이었다.


모차르트와 대본작가 로렌조 다폰테가 함께 쓴 3개 오페라(‘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를 매년 하나씩 풀 스테이지 버전으로 디즈니 홀 무대에 올린 이 프로젝트는 각 작품의 무대와 의상을 세계적인 건축가 3명과 패션디자이너 3명에게 맡긴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때 첫 작품이 프랭크 게리가 무대를 꾸민 ‘돈 조반니’였다. 게리는 맨 뒤의 합창석을 다 들어내고 오케스트라 석을 완전히 뒤로 밀어붙여 살짝 올린 다음 넓어진 앞쪽 공간을 무대로 사용했다. 온통 검은색 배경에 새하얀 종이들이 거대하게 구겨져 빙산을 이룬 세트, 그 가운데 놓인 눈부시게 흰 박스들 위에서 가수들이 센슈얼하고 환상적인 공연을 펼치던 그 파워풀한 무대가 지금껏 본 가장 인상적인 공연으로 남아있다.

다음해 ‘피가로의 결혼’은 건축가 장 누벨이, 세 번째 ‘코지 판 투테’는 자하 하디드가 무대 디자인을 했는데 프랭크 게리의 작품이 단연 독보적이었다.

이번 ‘라인의 황금’에서 게리는 반대로 오케스트라 석을 살짝 내려 앞으로 배치했고(단원들이 마치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냈다), 높아진 뒤쪽 공간에 대형 나무박스들을 설치했다. 가수들은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높낮이가 다른 나무박스들 사이의 공간에서 움직이며 노래하고 연기했다.

14명의 가수들이 모두 훌륭했지만 가장 좋았던 건 오케스트라 연주였다. 오케스트라가 앞에 있고 가수들은 뒤쪽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데도 모든 소리가 홀 전체에 명료하게 울릴 정도로 두다멜은 대편성의 관현악 소리를 기막히게 조절했다. 세밀한 표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깊고 따뜻하고 풍요로운 바그너 사운드를 재연해냈고, 가수들과 오케스트라는 조금도 어긋남 없이 완벽한 흐름을 유지했다.

오랜만에 ‘라인의 황금’을 감상하고 나니 링 사이클의 나머지 작품들 ‘발퀴레’, ‘지그프리트’, ‘괴터다메룽’(Gotterdammerung)도 다시 보고 싶은 열망이 솟아났다. 독일 낭만파 악극의 절정을 보여주는 이 오페라는 고대 북유럽 신화를 통해 인간 본질을 파고든 작품으로, 영화 ‘반지의 제왕’과 비슷한 내용과 분위기를 갖고 있어 자주 함께 비교되곤 한다. 신, 거인, 난쟁이, 인간이 반지 쟁탈전을 벌이며 사랑과 욕망, 배신과 복수를 펼치는 음악극으로 전체 공연에 17시간이 소요되는 대작이다.

LA 오페라가 2009~2010년 처음으로 링 사이클 페스티벌을 열었을 때 열심히 쫓아다니고 기사도 많이 썼던 기억이 새롭다. ‘오페라의 에베레스트 등반’이라 불리는 초대형 공연을 LA에서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흥분했고, 독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한 추상적이고 독창적인 무대에 매혹됐었다. 어마어마한 재정이 소요된 프로젝트라 과연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는데 이번에 그 첫 편이라도 감상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혹시 두다멜이 디즈니 홀에서 링사이클을 완성하려는 것은 아닐까, 기대해보지만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한 작품의 공연시간이 4~5시간에 달하는데다 두다멜은 2년 후면 뉴욕 필하모닉 음악감독으로 떠날 예정이라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다멜과 LA 필은 지난 시즌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3일에 걸쳐 연주한 적이 있다. 총 4시간이 넘는 3막의 오페라를 하루에 1막씩 공연한 것이다. 1막의 공연에만도 인터미션 없이 한 시간 반씩 소요됐으니, 관객들로서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오페라를 사흘 동안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고, 가수들로서는 그 힘든 바그너 노래를 충분한 기량으로 노래할 수 있어서 편안했던 공연이었다.

바그너의 오페라들은 전통적인 개념의 ‘아리아’라 할 만한 아름다운 선율이 거의 없고, 가사는 시적이고 철학적이며, 장중한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쉬지 않고 노도와 같이 흐르기 때문에 가수도 힘들고, 듣는 사람도 힘들고, 오케스트라도 힘들어서 자주 공연되지 않는다. 하지만 힘들고 난해할수록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법, LA의 바그네리안들을 위해 다시 한번 바그너 축제가 열리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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