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달 15일 6년 반 만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미국을 다시 방문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하고 지정학적 리스크가 현실화하는 상황에서 양국 정상의 만남은 그 자체로 세계의 관심사였다. 회담 직후 바이든 대통령은 “글로벌 도전 앞에서 양국의 공동 리더십이 필요하고, 우리는 진전을 이뤘다”고 자평했고 시 주석도 “상호 공존, 평화 공존, 상생 협력은 50년 미중 관계 역사에서 도출된 경험”이라고 화답했다.
실제로 미국은 중국의 체제 변화와 신냉전 및 대중국 압박을 위한 동맹 강화를 추구하지 않고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으며 중국과의 충돌을 원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다섯 가지 약속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인공지능(AI) 분야의 대화 메커니즘 구축, 마약 단속 협력 실무팀 구성, 고위 군사급 소통 복구, 내년 항공 노선 대폭 증설, 다양한 인적 교류의 확대, 기후변화 위기에 대한 공동 대응에 관한 새로운 합의도 했다.
물론 미국과 중국 모두 이번 회담에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았고 최소한의 이익 균형을 찾는 데 주력했다. 미국에서는 이번 회담 결과에 대해 대체로 일시적인 완화 국면일 뿐 근본적 변화를 위한 서막은 아니라고 봤다. 즉 중국의 대국 부상에 대한 의지를 대화만으로 약화시킬 수는 없고 설득의 방식으로 중국 외교정책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중국 내에서도 신중한 비관론이 우세했다.
즉 중국에 대한 미국의 사고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고 미국 대선이 본격화하면 다시 미국의 ‘중국 때리기’가 노골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럼에도 미중 양국은 협력의 필요성과 위기관리의 중요성에 공감했고 신냉전과 같은 승자 독식 게임 대신 경쟁 영역을 성숙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공동 인식에 합의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미중정상회담은 어색한 한중 관계를 바로잡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우선 미국이 대중 수출과 투자 제한 조치를 고수하면서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기회의 창을 확대해주지 못했다. 더욱이 북한이 군사정찰위성인 만리경-1호를 발사한 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를 촉진하고 관리하는 데도 성과가 없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거듭 강조했지만 시 주석은 이해 당사국들이 북한의 합리적인 우려를 들어야 한다고 날을 세우면서 견해차만 확인했을 뿐이다.
한중 관계는 양국 정책 결정 과정의 특성상 정상회담을 통해 물꼬를 틀 수 밖에 없다.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호주·중국 관계는 앤서니 앨버지니 신임 호주 총리가 7년 만에 중국을 방문하면서 교착 상황을 타개했고, 미일 안보 협력과 원전 오염수 문제 등으로 중국을 자극하면서 악화된 중일 관계도 이번 APEC 회의 기간 정상회담을 통해 위기관리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우리 정부가 당당한 외교를 표방하고 대중국 저자세 외교를 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과소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APEC 회의 기간에 시 주석이 멕시코 대통령, 페루 총리, 피지 총리, 브루나이 국왕, 일본 총리를 두루 만나는 동안 우리의 기대와 달리 한중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한 배경을 살필 필요가 있다.
사실 한중 관계가 미중·한미·남북 관계와 깊이 연동돼있지만 한국의 독자적 접근 방법 없이 해결되기는 어렵다. 더구나 중국은 한미 동맹이 공고화할수록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더욱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창을 통해 한국을 보고 있다. 또 북한에 대한 단념 전략에 기초한 담대한 구상만으로는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건설적 역할을 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미중 관계와 한반도 문제를 리셋해야 할 상황이 나타날지 모른다.
26일 4년 3개월 만에 부산에서 열린 한일중 외교장관회의도 대화 채널은 복원했지만 쟁점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다. 이러한 어색한 상황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가치와 이익, 명분과 실제를 섞고 정책의 운신 폭을 넓히면서 한중 관계를 동태적으로 접근할 때 비록 어려운 시기이지만 국가 이익이 손에 잡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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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