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제발 숨 좀 쉬어라”
2023-08-22 (화)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지난 반세기 동안 ‘마이애미 시쿠아리움’(해양유락공원)에서 서커스 쇼를 벌이며 관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온 범고래 ‘롤리타’가 나흘 전 바다를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향년’ 57세. 감금된 범고래들 중 최장수이자 마지막 남은 포로 범고래였다. 고향인 시애틀 인근 연안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동물보호단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환갑 전 방생이 전망돼온 터여서 더욱 안쓰럽다.
롤리타의 자유방면을 촉구해온 프로풋볼 팀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의 짐 어세이 구단주는 수족관 측이 롤리타를 풀어주면 플로리다와 대각선으로 미국 서북부 끄트머리의 캐나다 국경 앞바다까지 안전수송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경비는 최소 2,000만달러가 들 것으로 어세이는 추정했다.
롤리타는 1970년 같은 ‘문중’의 다른 또래들과 함께 워싱턴주 윗비 아일랜드 연안에서 포획꾼들에게 생포됐다. 그 과정에서 어린 범고래 4마리와 어미 한 마리가 학살당했다. 당시 비극의 현장에는 새끼를 잃은 범고래들의 통곡소리가 밤새 이어졌다고 했다. 1960~70년대 워싱턴주 근해에서 270여 마리가 잡혔고 50여 마리가 세계각지의 수족관과 해양 유락공원에 팔려갔다.
약 20년 전 시애틀로 전근한 후 지리를 익히면서 금방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범고래 벽화와 문양이 무소부재인데다 원주민 부락마다 범고래 장승이 서있었다. 이빨을 지퍼처럼 과대 표현했다. 워싱턴주를 상징하는 해양 포유동물이 범고래다. 워싱턴주 내해인 퓨짓 사운드에 상주하는 범고래 수가 늘거나 줄면 서북미 최대일간지인 시애틀타임스가 긴급뉴스로 보도할 정도였다.
이름이 고래일 뿐 범고래는 검은 바탕에 흰 반점이 있는 덩치 큰 돌고래다. IQ도 비슷하게 높다. 호랑이처럼 송곳니가 날카로워 범고래, ‘이빨 고래,’ 살생 고래(킬러 웨일)로 불리지만 호랑이 고래 아닌 ‘늑대 고래’로 불려야 제격이다. 늑대처럼 무리를 지어 사냥한다. 연어 등 물고기가 주식이지만 늑대 떼가 들소를 사냥하듯 상어와 고래도 잡아먹는 바다의 지배자이다.
통상 범고래는 학명인 ‘오카(Orca)’로 불린다. 남북극 얼음바다와 적도 열대바다를 포함한 5대양을 종횡무진 누빈다. 이들 중 퓨짓 사운드 일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부류가 ‘남부 상주파’로 분류된다. 이 지역의 연어, 특히 오카의 최애 먹이인 치누크 연어가 날이 갈수록 격감해 아사하는 범고래가 속출하자 연방정부는 2005년 남부 상주파 오카를 멸종위기 동물로 지정했다.
워싱턴주 원주민들은 오카를 거의 신성시한다. 조상의 혼을 지닌 영매인양 떠받든다. 전설도 많다. 여름철의 오카가 겨울철엔 늑대로 변신한다거나 오카들이 해저 나라에서 사람으로 살며 모든 익사자들을 받아준다는 전설도 있다. 롤리타 고향의 라미 부족은 애당초 롤리타가 자기들의 가족이었다며 돌려달라고 탄원해왔다.
시애틀 체류 끝 무렵인 2018년 7월 범고래 얘기가 다시 대서특필됐다. 어미 오카가 출산 직후 죽은 새끼의 사체를 머리에 이고 퓨짓 사운드 안을 맴돌며 1,000마일 넘는 애도의 장송행진을 계속하고 있다는 가슴 아린 뉴스였다. 수명이 최대 80년인 암컷 범고래는 대략 5년에 한번씩 한 마리만 출산하지만 새끼들 중 30~50%가 7개월 안에 죽는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도록 똑같은 뉴스가 5년 후인 지난주 본국 언론에 보도돼 뜨악했다. 시애틀 아닌 제주도 서귀포 근해에서 죽은 새끼를 머리에 이고 헤엄치는 남방 큰 돌고래(범고래)가 포착됐다고 했다. 죽은 새끼에게 “제발 숨 좀 쉬라”고 사정하는 듯 어미가 사체를 수면 위로 계속 솟구쳐 올리더란다.
코끼리와 까마귀 등 일부 동물들도 일종의 장례의식을 치른다지만 죽은 새끼를 향한 어미 범고래의 절규와 비교할 수 있을까? 만물의 영장은 어떤가? 지난 2018년과 2019년 출산한 아기를 연거푸 살해해 냉동고에 처박아둔 수원의 30대 여인은 반성은커녕 일반살인죄보다 형량이 가벼운 영아살인죄를 적용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단다. 롤리타가 죽은 18일자 신문보도이다.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