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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고 싶다”

2023-08-08 (화)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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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러시아 병사의 편지가 심금을 울리고 있다. “곧바로 전투에 투입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두렵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다. 그들(우크라이나군)도 우리를 죽이지 않길 바란다.”(2022년 11월30일)

“아내를 정말 사랑한다. 빨리 보고 싶다. 당신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 부디 날 기다려 달라”던 그, 발목을 부러뜨려서라도 돌아가고 싶어 하던 애절한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지난달 22일 아내와 마지막 통화를 하고 나서 얼마 뒤인 7월 첫째 주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의 군복 주머니에 이 일기만 남았다.

작년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동원령으로 최전선에 투입된 모스크바 출신 비탈리 탁타쇼프(31)는 2018년 결혼한 아내와 두 살 된 아들을 더 이상 못 보게 되었다. 건설 노동자로 평범하게 살며 주말이면 아들이 세발자전거 타는 것을 도와주던 그였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노트 33쪽에 걸쳐 기록한 일기에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담았다.


이 전쟁을 일으킨 푸틴은 전 부인과의 사이에 딸 둘이 있고 다른 2명의 여성 사이에서 4명의 자녀가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침공 2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때에 31세 연하 애인과 자녀 4명은 스위스 별장으로 대피시켰다고도 하고 핵전쟁 대비 최첨단 지하도시 알타이 공화국에 피신시켰다고도 한다. 어린 자녀도 있다는 푸틴은 왜 이리 잔인하게 러시아의 아들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있는 것인지.

2022년 2월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이 푸틴의 전쟁으로 30만여 명의 러시아인들이 전쟁에 동원되어 들판에서, 참호에서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다. 작년 8월에는 러시아 병사들이 우크라이나 북부 요충지 이지움에서 퇴각 열흘 전에 피로와 사기 저하 문제를 호소하며 상부에 강제전역을 호소하는 친필 편지를 작성하기도 했다.

러시아 어머니들은 아들의 실종과 사망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못 받고 있다. 러시아 국영방송은 우크라이나가 침략군이고 러시아는 해방자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한다.

태평양전쟁(1941~1945) 당시 일본은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욱일기 펄럭이면서 전장에 나선 군인들은 군가를 부르며 전진하여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바다에 가면 물에 잠긴 시체! 산에 가면 풀이 난 시체! 천황 곁에 죽으면! 후회 없으리!”(김병인 작 ‘디데이’ 인용)

이 얼마나 헛헛하고 알맹이 없는 군가인가. 이들은 천황의 적, 제국의 적과 싸우면서 죽어갔다. 국민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 일본제국은 망했다. 패망이후 천황은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스스로 밝혔고 일본인들은 낙망했다. 이처럼 국민의 일방적인 희생과 목숨을 요구하는 자는 신이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며 범죄자일 뿐이다.

일본군인 중에서도 일찌감치 천황이란 허상을 깨달은 사람은 “천황의 곁으로는 돌아가지 않아. 내 부모형제, 내 처자식에게 돌아갈거야.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에게 돌아갈거야.” 다짐했지만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살아남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고대중국에서도 천자(天子)로 불리며 추앙받는 황제뿐만 아니라 관리나 백성들도 사람을 함부로 상하게 하거나 죽이면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다. 특히 송나라 황제 인종은 역병이 창궐할 때 백성부터 챙겼다. 병이 창궐한 지역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다 숨진 병사들의 가족을 돌봤고 죄수들은 징역형을 면제해줘 가족의 생계를 돌볼 수 있게 했다. (양산박에 모인 108영웅 활약을 그린 걸작 수호전(水滸傳)에 인종 황제 재위기간, 역병 진압 이야기가 나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황제든 대통령이든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생명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더 이상 남편과 친지, 아들이 죽어가기 전에 러시아 어머니들이여, 제발 속지 마시오, “우리 아들 돌려달라”고 한 목소리로 외치기 바란다. 독재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는 “나는 살고 싶다”는 자국민 러시아 병사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 것인가.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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