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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패자… 러시아

2023-07-03 (월)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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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저서 “제 3의 물결”에서 사회 지배층인 엘리트 사이의 균열은 독재정권이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지적했다.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체제 이탈은 일련의 중대한 변화를 촉발한다. 반대로 체제 내부의 이탈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독재자는 명줄을 보존한 채 권력을 유지하게 된다.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가 이 경우에 속한다.)

지금의 러시아에 헌팅턴의 원칙은 어떻게 적용될까?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실패한 공격은 러시아를 지배하는 엘리트 사이의 마찰을 시사한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은 불과 하루 이틀 만에 사태를 수습했다. 프리고진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크렘린의 핵심인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바로 이 때문에 프리고진은 돈키호테식의 비현실적인 모스크바 진격을 중단했다. 푸틴은 재임 중 진보진영의 반대세력을 분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민족주의 진영의 도전자들까지 제압해야 한다.

러시아의 권력다툼은 “어두운 공간”에서 일어난다. 이 말의 원조는 윈스턴 처질이다. “크렘린의 정치적 권력다툼은 양탄자 아래서 진행되는 불독의 개싸움과 흡사하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듣는 것이라곤 으르렁대는 소리뿐이다. 양탄자 아래서 뼈다귀가 삐져나와야만 비로소 승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비유적으로 프리고진의 뼈를 보고 있지만 아마도 조만간 그의 뼈를 실제로 보게 될 것이다.


러시아 사회의 현 상황은 양탄자 아래의 개싸움과 달리 외부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필자는 최근 러시아인의 평균수명에 관한 통계를 접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인구학자인 니콜라스 에버슈타트가 서베이 결과를 분석해 작성한 2022년도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 열다섯 살인 러시아 소년의 기대수명은 아이티의 동갑내기 소년과 같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러시아가 천연자원 부국이자 도시화와 산업화를 달성한 사회로 일반 대중의 교육수준과 반 문맹률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다는 사실이다.

에버슈타트는 러시아의 인구가 30년째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2013년에서 2015년 사이에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사망률이 출생률보다 높다. 하지만 니콜라스의 말대로 이런 추세는 산업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의 보고서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은 러시아인의 기대수명이다. 코비드와 우크라이나 전 발생 이전인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는 러시아의 15세 소년의 잔여수명을 53.7년으로 추산했다. 이는 15세 아이티 소년의 기대수명과 동일하지만 같은 나이의 예멘, 말리와 남수단 소년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올해 15세인 스위스 소년의 잔여수명은 러시아 동갑내기에 비해 13년이 길다.

교육은 보통 건강과 상관관계를 보이지만 러시아의 경우는 예외다. 에버슈타트는 교육수준으로 볼 때 러시아는 세계의 ‘일류 국가’에 속하지만 근로연령 인구의 사망률은 ‘4류 국가’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교육성취도를 살펴보면 더욱 이해하기 힘든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

특히나 과학 분야의 경우 잘 훈련된 거대한 숙련인구를 거느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지식 경제는 구 소비에트 시대에 비해 퇴보했다. 2019년 러시아의 국제 특허신청 순위는 오스트리아보다 한 단계 아래였다. 러시아의 인구는 오스트리아의 16배다. 현재 러시아의 연례 미국 특허취득 순위는 알라배마주와 동률이다. 러시아 인구는 앨라배마주의 30배에 달한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숙련된 도시출신의 교육받은 러시아인들이 대거 국외로 탈출했기 때문에 이같은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놀라운 러시아의 부조화를 어떻게 설명할까? 알렉산더 에트킨은 그의 새로운 저서 “현대화를 외면한 러시아”에서 푸틴이 창의적인 생산을 외면한 채 러시아를 부존자원을 파먹고 사는 기생충 국가로 만들었고, 국민 복지 측면에서 현대국가에 요구되는 기능을 단 하나도 수행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지배층의 배를 불리는 도둑정치의 내재된 특성은 부패다. 에트킨에 따르면 소련붕괴 이후 러시아 사회의 불평등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2011년과 2012년의 반 푸틴 시위 이후, 러시아 정부의 반 현대화 기조는 더욱 강화됐다. (당시 푸틴은 시위의 배후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을 지목했다.)


푸틴 정권에게 서방은 러시아를 전염시킬 현대화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세력을 대표한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하면서 행한 연설에서 푸틴은 미국이 러시아의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고 “퇴보와 퇴화로 직결되는 반인간적 가치를 강요하려 든다”고 주장했다. 푸틴에게 러시아의 현대화는 능동적인 시민사회와 개선된 의료제도, 평범한 시민의 기회 확대 및 도둑정치의 쇠퇴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종교와 전통적 윤리, 인종혐오와 엄격한 성별관습 순응을 강조하는 전통적 러시아를 옹호한다.

이들 모두를 합한 결정체가 무엇일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러시아의 가장 큰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에서 패하고 있다는 것이라기보다 21세기의 패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예일대를 나와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파리드 자카리아 박사는 국제정치외교 전문가로 워싱턴포스트의 유명 칼럼니스트이자 CNN의 정치외교분석 진행자다. 국제정세와 외교부문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석가이자 석학으로 불린다.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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