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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요리사’에서 ‘반역자’로

2023-06-28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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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대반란 극이었다. 지난 주말 러시아의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이 무장반란을 일으켜 모스크바로 진격했던 초유의 사건으로 세계가 떠들썩하다.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일으킨 군사쿠데타는 크렘린궁을 125마일을 앞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벨라루스 대통령의 긴급중재로 하루 만에 끝났지만, 그 배경과 향후 파장에 대해 분석과 추측이 요란하다.

한창 전쟁 중인 상황에서 자신의 심복이자 직접 키운 용병군단에 의해 공격받은 이 사건은 20여년 러시아를 철권통치해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최대 위기이자 굴욕이고 충격이었다. 충격파는 앞으로도 한동안 이어지면서 푸틴의 지도력에 의문이 제기될 것이며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도 역시 달라질 것으로 서방 소식통들은 예측하고 있다.


충복이던 프리고진은 왜 하루아침에 반역자가 됐을까? 그 배경도 영화처럼 드라마틱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인 프리고진(62)은 부랑배 출신의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재벌)다. 20세 때 절도와 강도 등으로 9년 간 옥살이했던 그는 출옥 후 핫도그 장사로 돈을 모았고, 식료품점, 카지노를 거쳐 고급식당 사업에 뛰어들었다. 1997년 설립한 선상 레스토랑 ‘뉴아일랜드’는 2001년 푸틴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식사했고 모리 요시 일본 총리와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다녀가면서 푸틴의 만찬과 크렘린궁 연회까지 도맡게 됐다. 그가 ‘푸틴의 요리사’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다.

푸틴의 신뢰가 깊어지자 프리고진은 케이터링 회사를 설립, 학교와 러시아군 급식 공급계약을 따내면서 거부가 되었다. 여기서 번 돈으로 여론조작회사를 설립했는데, 2016년 미국대선 때 허위 댓글로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지원하여 제재대상에 오른 바로 그 회사다. 당시 뮬러 특검팀은 프리고진을 미국대선 개입의혹으로 기소한 바 있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4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이 민간군사기업은 푸틴의 ‘해결사’로 암약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동 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비밀작전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잔혹한 범죄를 자행하며 악명을 떨쳤다. 이어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 분쟁 등에 투입돼 푸틴을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바그너그룹은 급속도로 성장, 전쟁에서 핵심세력으로 부상했다. 최전선에 나가 싸우면서 전쟁을 주도했고 우크라이나 동부 최대 격전지였던 바흐무트에서 승전한 것도 이들의 공이었다. 그러나 대원들의 희생도 커서 지난해 프리고진이 죄수들을 대거 용병으로 모집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있다.

문제는 프리고진이 너무 나대면서 러시아 군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정치적 부상을 꾀했다는 데 있다. 당연히 크렘린 관료들은 그를 견제하고 거세하기 위해 바그너그룹을 수세에 몰기 시작했다. 지난 10일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장관은 바그너그룹을 포함한 모든 비정규군에게 “7월부터 국방부와 공식계약을 체결하라”고 명령했다. 프리고진의 지휘권을 빼앗고 바그너그룹을 정규군에 통합시키려는 조치였다. 또 바그너그룹에 대한 무기, 식량, 의료 등 물자지원을 줄이고 전쟁터에 방치했다. 마지막 일격은 반란 하루 전인 22일 러시아 국방부가 바그너그룹의 후방 캠프를 미사일로 공격해 용병 2,000여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속된 말로 “꼭지가 돈” 프리고진은 23일 쇼이구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의 처벌을 요구하며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푸틴 대통령이 이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강경대응 방침을 밝히자 프리고진은 “이건 군사 쿠데타가 아니라 정의의 행진이고, 우리는 반역자가 아니라 애국자”라며 주둔지에서 1,000㎞거리나 되는 모스크바로 단숨에 치고 올라갔다.

실제로 쿠데타 혹은 내전이 일어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군사전문가들은 전한다. 2만명 남짓한 프리고진의 병력이 러시아정규군의 방어를 물리치기는 힘들고, 모스크바 주변에는 정예부대들이 겹겹이 배치돼있어 전력이 압도적으로 밀리기 때문이다.


반란사태는 하루 만에 벨라루스 대통령의 중재로 종결됐다. “프리고진은 반란을 멈추고 벨라루스로 떠나고 푸틴은 그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맺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라는 진단이 나온다. 우선 푸틴의 철옹성에 균열이 시작되었다. 반란군을 진압하지 않고 협상했다는 점에서 ‘약한 모습’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 내 여러 파벌들이 권력투쟁에 나설 가능성이 커졌다. 푸틴은 이제 전장뿐 아니라 집안 단속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푸틴의 끝이 시작됐다”고 점치는 언론마저 있을 정도다.

바그너그룹은 어떻게 될까? 푸틴은 26일 바그너 용병들에 대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하고 “국방부와 계약하거나 집에 가도 된다. 아니면 벨라루스로 가라”고 했다. 바그너그룹을 해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가 두려워하는 용병군단을 해산한다면 서방과 우크라이나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고진은 어떻게 될까? 벨라루스에 망명했다고는 하나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확실한 것은 푸틴이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러시아 내부의 배후에 있는 배신자들을 찾아내 대대적인 숙청에 나설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모쪼록 이 짧은 쿠데타 소동이 러시아의 혼란과 사기저하로 이어져 우크라이나의 전쟁 승리로 이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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