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저커버그와 팀 쿡의 비전 승부
2023-06-15 (목)
정혜진 서울경제 실리콘밸리 특파원
‘원 모어 싱(One more thing)’
지난 6일 미국 실리콘밸리의 쿠퍼티노의 애플 파크. 한 시간 반 가까이 진행된 기조연설 끝에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입에서 이 같은 말이 나오자 수천여명의 참가자들 사이에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의 전설적인 프레젠테이션 때마다 이 말이 있었다. 그 뒤에는 노란 서류 봉투에서 맥북 에어가 스르르 나오는가 하면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아이팟 나노가 등장하고 무대 위에 있던 잡스가 아이폰 속 작은 화면에 등장해 영상 통화 ‘페이스타임’을 선보였다.
원 모어 싱이라는 글자가 사라지고 블랙홀을 삼킨 듯한 검은 화면에서 푸른빛을 반사하는 둥근 고글 형태의 기기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며 글자가 나타났다. ‘비전 프로(Vision Pro)’. 동시에 쿡 애플 CEO가 스티브 잡스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롭게 비전을 제시한 순간이었다.
테크업계에서는 지난해부터 애플의 혼합현실(MR) 헤드셋이 출시될 것이라는 게 이미 정해진 미래처럼 예고된 바 있다. 가격과 명칭에 차이가 있긴 했지만 이미 스펙과 실물 디자인도 어느 정도 공개된 상황이었다. 새로울 건 없어 보였다. 또 하나의 메타버스 기기가 추가되는 것으로 모두가 받아들였다. 하지만 쿡 CEO는 메타버스는 하나도 언급하지 않고 이 제품을 소개했다. 그는 이 기기를 ‘공간 컴퓨터(Spatial Computer)’라고 정의하며 애플에서 최초로 삼차원(3D) 공간을 기반으로 한 인터페이스를 구상했다고 강조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명칭이었다. 동시에 모두가 익숙한 단어로 접근할 때 낯선 프레임의 등장은 테크에 몸담은 이들로서는 흥분되는 일이기도 하다.
참가자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가운데 한 여성이 소파에 앉아 비전 프로를 즐기는 영상이 나타났다. 이어 청소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말을 걸자 여성이 쓰고 있던 기기 화면에는 아이의 형태가 잔잔하게 나타났다. 기기를 쓰고 몰입하는 상황에서도 외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한 참가자는 “아이를 재우려고 몇 시간씩 손발이 묶여 있을 때마다 아이 소리를 바로 들을 수 있으면서 화면 빛이 새어나오지 않는 스마트폰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이제야 이를 본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기자가 비전 프로를 체험했을 때도 ‘환경’ 모드로 눈앞에 마운트 후드 앞 호수가 기자가 있던 공간 전체를 채우는 와중에도 옆 자리의 애플 직원이 대화를 시작하자 그 전경 사이로 흐릿한 형태가 나타나고 다시 몰입도를 낮춰 그녀와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몰입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은 가상현실에만 몰입해 실제 세계와 고립될 수 있다는 메타버스의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기도 하다.
메타버스 분야에서 가장 애정과 전문성이 높은 마크 저커버그 메타 창업자도 애플의 비전 프로를 두고 한마디 했다. 그는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오프라인으로 개최한 올핸즈 미팅을 통해 애플 비전 프로를 ‘혼자 소파에 앉아있는 기기’라고 언급하며 평가 절하했다.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기본 속성으로 하는 메타의 퀘스트 프로와는 차이가 크다며 “비전 프로가 컴퓨팅의 미래가 될 수 있겠지만 내가 원하던 기기는 아니다”라고 갈 길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애플 비전 프로가 메타의 메타버스 기기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메타가 나서 분명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애플이 원하던 코멘트였을 것 같다.
메타버스, 혼합현실(MR) 등 모두 이용자들에게는 모호한 단어였던 만큼 이제 애플이 비전 프로의 흥행 여부는 누구의 비전이 이용자들을 설득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가상 세계에 있는 개인들이 소통하는 것을 선호하는지 실제 공간에 있는 개인이 현실과 분리되지 않은 채 기기에 몰입하는 것을 선호하는지 등 기기의 경험과 용도를 결정하는 건 소비자들이다. 가격은 나중 문제다. 비전과 경험이 설득되어야 가격 역시 고려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메타버스 열풍이 지고 생성형AI가 모든 산업계를 뒤흔드는 가운데 쿡 CEO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베팅했다. 초창기 아이디어부터 잡스 창업자가 관여했던 에어팟, 애플워치 등과는 달리 비전 프로는 잡스의 영향 없이 이룬 일이기도 하다. 이 비전이 설득된다면 쿡 CEO는 잡스의 완전한 후계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애플이 혁신의 아이콘으로 꼽혔던 이유도 새로운 비전을 설득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잡스의 모습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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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진 서울경제 실리콘밸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