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잉카·아즈텍 문명 등을 일으킨 아메리카 원주민이 전멸 당하다시피 한 데는 유럽 침략자들이 퍼트린 천연두 등 바이러스의 영향이 컸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 이후 100여 년만에 90% 가까운 원주민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바이러스의 영향은 컸다.
앞서 14~15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흑사병)는 인구의 3분의 1가량을 숨지게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페스트는 동서양 통틀어 총 1억 명가량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산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터진 스페인 독감(1918~1920년)도 5,000만 명 가까운 인명을 뺏어간 참사로 기록된다. 일제 통계라 축소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스페인 독감으로 14만 명가량 희생됐다.
그만큼 인류사는 바이러스·세균과의 전쟁사로 볼 수 있다. 인류는 천연두로 인해 동서고금을 통틀어 수억 명의 희생을 딛고서야 겨우 극복할 수 있었다. 1979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종식 선언으로 천연두는 인류가 퇴치시킨 유일한 바이러스가 됐다.
특히 감염병이 휩쓸 때마다 세계적으로 경제·사회 구조에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페스트 팬데믹(대유행)이 중소 영주의 파산으로 인한 봉건 경제 쇠퇴와 자영농과 부르주아 계급의 출현, 르네상스 운동을 촉발한 게 단적인 예다. 아메리카의 천연두 팬데믹은 스페인 등 유럽 정복자들이 대항해 시대 당시 아메리카 대륙을 손쉽게 정복하게 해 막대한 금·은 착취와 상공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독감은 대영제국의 쇠퇴와 함께 중장기적으로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의 힘에 의한 세계 평화)’의 토대를 놓는 계기가 된다.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발원해 2020년 초부터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코로나19 팬데믹도 BC(before corona·코로나 이전)와 AC(after corona·코로나 이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상을 크게 뒤바꿔놨다. 온라인 등 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를 촉발했고 미·중 패권전쟁 등 탈세계화와 보호무역주의 추세를 심화시켰다.
지난 3년 간 코로나19 팬데믹의 게임 체인저는 미국에서 개발한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이었다. 이 백신은 전통 바이오 기술에다가 지질나노입자(LNP)·나노 등의 첨단 융·복합 기술이 접목돼 가능했다. 대학의 혁신 기술에 기업·정부·투자업계가 합심한 성과이기도 했다. 지금같은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도 여전히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다양한 감염병 출현에 대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본원은 물론 대학과 연구소, 기업의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있다.
우리는 바이오헬스를 강조하며 국가전략기술로 키우겠다는 정부의 목소리는 무성한데 실제 정부의 바이오헬스 투자 증가율을 보면 과거보다 오히려 크게 줄었다. 바이오헬스에 대한 벤처캐피탈 등의 투자는 1년 넘게 거의 사라졌다시피 할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다. 전통 제약바이오에서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에 머무르는 현실에서 반전의 계기를 만들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서울경제가 지난 31일~6월1일 워커힐 서울에서 이틀간 다수의 해외 석학을 초청해 ‘보건의료·경제·안보의 핵심, 첨단바이오 시대를 열자’를 주제로 글로벌 컨퍼런스인 ‘서울포럼 2023’을 개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 바이오헬스 시장이 그린·화이트 바이오를 제외하고도 반도체·자동차·조선을 합친 것보다 큰 약 2,600조 원이나 되는 현실에서 퍼스트무버(선도자)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맞춤형 유전자·세포 치료, 디지털 분석·치료, 뇌과학, 재생의료·인공장기, 혁신 의료장비, 원격의료, 푸드테크(그린바이오), 합성생물학(화이트바이오) 같은 첨단바이오에 집중투자하고 산·학·연·정·병의 유기적인 혁신 생태계를 구축할 때다. 반도체·배터리 등에 뒤이어 차세대 성장 동력을 적극 키우지 않으면 초고령화를 앞둔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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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본 서울경제 선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