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수없이 많다.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태종 이방원의 쿠데타 등 일부러 꾸밀래도 힘들 정도로 극적인 요소가 많고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2015년 SBS가 만든 ‘육룡이 나르샤’는 수작으로 꼽힐만 하다. 이 드라마 제목은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은 최초의 한글 문헌 ‘용비어천가’ 중 ‘해동 육룡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이시니’에서 따온 것이지만 ‘용비어천가’의 육룡이 태조와 태종을 포함, 그 위 4대조를 지칭한 것과는 달리 ‘육룡이 나르샤’의 육룡은 태조, 태종과 정도전, 분이, 이방지, 무휼 등 민초들을 포함시킨 것이 이채롭다. 조선 건국에는 소수 엘리트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도 가세했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왜 하필 여섯 마리의 용인가 하는 이유는 조선 선비의 필독서 중에서도 중요한 책인 ‘주역’ 64괘가 모두 6개의 효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효는 두가지가 있는데 막대기가 긴 것은 양효, 가운데가 끊어진 것은 음효다. 이 막대기 3개가 모인 것을 소성괘, 소성괘 2개가 모인 것을 대성궤라 부른다. 태극기 네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소성괘로 소성괘의 경우의 수는 2의 세 제곱으로 8개, 대성궤 수는 소성궤의 제곱으로 64개다. 주역은 이 64궤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풀이할 수있다고 본다. 주역의 첫번째 궤인 건궤는 땅속에 묻힌 잠룡이 6개의 효를 거쳐 하늘로 오르는 이야기다.
‘육룡이 나르샤’에는 기억에 남는 명장면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삼한 제일검’으로 불리던 악당 길태미(박혁권 분)가 이방지와 맞서 싸우다 약한 백성을 수탈한 죄를 묻자 “그럼 약한 자를 짓밟지 강한 자를 짓밟냐? 약한 자한테 빼앗지 강한 자한테 빼앗냐고! 세상이 생겨난 이래 약자는 언제나 강자한테 짓밟히는 거야. 천년 전에도 천년 후에도 … 이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야”라고 외치는 장면이다. 이처럼 간결하고 정확하게 슬픈 인류의 역사를 설파하기도 힘들다.
또 다른 중요한 에피소드 하나는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한 조민수가 라이벌 이성계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암살하려는 장면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막 이성계를 공격하기 직전 조민수의 가노 하나가 옛날 백성 하나를 성폭행한 일을 자랑스럽게 떠벌인다. 마침 그 앞에 앉아 있던 이성계의 무사가 성폭행당한 소녀와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다. 분을 참지 못한 이성계 부하들과 싸움이 벌어지고 이 돌발 사태로 조민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난다.
훗날 가노 하나를 잘못 둔 우연으로 대사를 그르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도전은 “그것이 어찌 우연이겠느냐”며 조민수를 비롯한 고려의 권문세족이 수많은 민중을 수탈하고 괴롭혔으며 가노 중에 그런 인간이 있었던 것은 그 당연한 업보라고 말한다.
2018년 중간 선거, 2020년 대선, 2022년 중간 선거를 내리지고 포르노 배우와 성관계 후 입막음을 위해 돈을 주고 장부를 조작한 혐의로 기소된 루저 도널드가 지난 주 뉴욕에서 열린 민사 소송에서 또 졌다. 9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20여년전 트럼프가 자신을 성폭행하고 명예를 훼손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진 캐럴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녀를 성추행하고 명예를 훼손한 대가로 500만 달러를 징벌 배상하라고 평결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을 앞두고 폭로된 ‘액세스 할리웃’ 테입을 통해 스타들은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자신이 허락없이 여성의 성기를 만진 연쇄 성추행범임을 사실상 실토했다. 이번 재판에서 판사는 이를 증거로 인용했고 두 명의 다른 여성이 자신들도 트럼프에게 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트럼프는 이 재판에 출석하지는 않았지만 캐럴 변호사와의 디포지션에서 “역사적으로 스타들은 다 그랬다… 지난 100만년 동안 항상은 아닐 지 몰라도 대체로 그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라고 말해 다시 한번 자신의 성추행 행적을 확인하면서 아무런 반성의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트럼프만큼 많은 약자를 수탈하고 여성을 성추행한 인간도 드물 것이다. 그의 수많은 파산과 대금 지급 불이행, 그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줄줄이 나선 여성들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트럼프에게 이번 소송 패배는 아마도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도 지난 70여년간 별 문제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을까.
주역 건괘 다음에 나오는 곤궤에는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살해하는 것은 일조일석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트럼프의 이번 징벌은 그동안 그가 저지른 숱한 악행이 쌓이고 쌓여 일어난 것이다. 앞으로도 그의 패배가 줄줄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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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