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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무게추 옮긴 한국, 호주 경험에서 배워라

2023-05-05 (금) 신경립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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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친구도, 영구한 적도 없다. 우리에게는 오직 영원하고 영구한 국가 이익이 있을 뿐이다.”

19세기 중반 대영제국의 재상 헨리 존 템플, 일명 파머스트 경의 말처럼 국제정치의 정수를 담은 표현이 있을까. 각자도생과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피아를 가르는 잣대는 예나 지금이나 오직 국익이다. 수년간의 살벌한 경제 전쟁을 뒤로 하고 최근 중국과 호주 사이에 흐르는 화해 기류는 이 진리를 확인해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노선을 고수했던 호주가 중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내정간섭 정황이 드러난 2017년 무렵이다. 이후 호주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중국 화웨이 통신 장비를 퇴출시키고 코로나19 ‘중국 책임론’을 제기면서 양국 관계는 파탄이 났다. 호주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은 2020년 호주산 석탄 수입 금지를 비롯해 와인·면화 등 총 13개 품목의 수입 규제라는 고강도 경제 보복에 돌입했다.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이었다. 중국은 지난해부터 고위급 회담을 자청하더니 올해 들어 “중국·호주 관계가 턴어라운드를 위한 결정적 단계에 진입했다”고 공언했다. 2월 말에는 2년여 만에 호주산 석탄이 중국 항구에 도착했고 호주산 보리에 대한 보복관세도 머지않아 철회될 예정이다. 지난해 총선 결과 호주 정권이 보수 자유당에서 중도 좌파 노동당으로 교체된 것은 중국의 태세 전환을 위한 명분이 됐다. 하지만 실상은 경제 보복이 호주보다는 자신의 목줄을 죄는 결과를 초래하자 중국이 백기를 들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의 압박을 이겨낸 호주의 무기는 철광석과 석탄, 그리고 적극적인 수출 다변화였다. 전방위 경제 보복 와중에도 중국은 수요의 60%를 의존하는 호주산 철광석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호주는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철광석 가격을 올려 중국의 무역 제재 효과를 상쇄했다. 또 인도와 일본 등 아시아 각국으로 석탄 수출을 늘리는 등 시장을 넓혔다. 호주산 석탄 공급이 끊기면서 극심한 전력 부족으로 곤경에 처한 것은 외려 중국이었다. 2020년 한때 호주 수출에서 48.8%를 차지했던 중국의 비중은 지난해 하반기에는 30% 아래로 떨어졌다.

호주의 중국 극복기는 대중 관계 변곡점을 맞은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중 틈바구니에서 이미 효력이 다한 ‘줄타기 외교’를 내세운 문재인 정부와 달리 윤석열 정부는 시작부터 한미 동맹 최우선 기조를 분명히 했다. 신냉전 시대에 미중 간 등거리를 유지하는 ‘균형 외교’로 안보와 경제 실리를 모두 챙긴다는 발상은 한낱 이상일 뿐이다. 진작에 효력이 다한 ‘안미경중’을 앞세워 중국 눈치를 살피던 문재인 정부 외교가 미국의 의심과 중국의 냉대, 고조된 북핵 위기라는 참사로 끝난 것만 봐도 그렇다.

윤석열 정부가 외교의 무게 추를 미국 쪽으로 옮긴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한미 간 끈끈한 동맹 관계를 자축하는 잔치와도 같았던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은 한국 외교의 ‘전략적 모호성’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이제 잔치는 끝났고 윤 대통령 앞에는 중국의 ‘전랑외교’라는 녹록지 않은 현실이 놓여있다.

물론 심기가 불편한 중국을 달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중 관계가 미중 패권 전쟁의 큰 흐름에 종속돼있는 상황에서 우리 외교력의 한계는 분명하다. ‘무역의 무기화’를 일삼는 중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호주의 경험이 보여주듯 거대 시장인 강대국의 위협을 무력화하는 데 필요한 것은 수출선 다변화라는 ‘방패’와 상대국에 반드시 필요한 ‘킬러 수출 품목’이라는 ‘창’이다. 철광석이나 석탄 같은 천혜의 무기가 없는 우리가 의지할 것은 인적자원이 창출해내는 고도의 기술력이다. 반도체 등 한국이 강점을 갖는 첨단 분야에서 독보적인 초격차 기술로 세계가 원하는 수출 품목을 육성한다면 그것이 곧 중국을 비롯한 강대국 외교의 지렛대가 될 것이다. 자국 이익을 위해 한국을 적대시할 수 없게 만드는 수출력을 갖추는 것이 신냉전 시대에 한국이 추구해야 할 균형 외교 전략이다.

<신경립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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