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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2023-03-28 (화)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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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옛 회사동료로부터 오랜만에 전화를 받았다. 둘째 아들부부가 결혼 후 십수년 만에 낳은 손자가 요즘 아장아장 걷는다며 그 재롱 보는 낙으로 산다고 했다. 그 친구의 아들이 결혼할 무렵 이미 첫 손녀 출생의 기쁨을 누렸던 나는 “아무렴, 그렇고말고”라며 연신 맞장구를 쳐줬다.

손자녀의 출생은 노인에게 묘한 행복감을 안겨준다. 본인 자녀가 출생했을 때보다 더 기쁘다는 노인들도 있다. 그런 행복감을 다음 세대에선 두 명 중 한명이 못 누릴 것 같아 안쓰럽다. 한국통계청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결혼이 필요 없다는 사람이 전체 국민 중 절반, 자녀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사람이 2030세대 중 절반을 상회한다.

지난 20일은 ‘국제 행복의 날’이었다. 유엔이 행복추구를 인간의 기본 권리이자 인류사회의 궁극 목표로 규정한 결의안을 지난 2012년 193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선포한 기념일이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반기문 씨였다. 국제 행복의 날 자체는 시들해졌지만 매년 그날 전후에 발표되는 ‘세계 행복 보고서(WHR)’는 요즘도 신문과 TV가 다투어 보도한다.


이 보고서는 유엔 산하 ‘지속가능 발전해법 네트워크(SDSN)’가 갤럽을 통해 설문조사한 각국 국민들의 주관적 행복감을 수치화하고 그에 따라 랭킹을 정한다. 잘사는 나라의 판정기준인 국민총생산(GDP)을 비롯해 건강, 기대수명, 정부신뢰도, 부정부패, 사회적 지원, 자선활동 등 7개 사항을 10점 만점 기준으로 본인들이 직접 매기도록 하고 있다.

올해 발표된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한국은 5.935점으로 146개 국가 중 59위다. 지난 10년간 매년 40~60위를 맴돌았다. 보릿고개가 운명인줄만 알았던 국민들이 남아도는 쌀을 주체 못하며 단군 이래 최고 호시절을 구가하고 있지만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OECD 38개국 중 한국보다 행복도가 낮은 나라는 그리스, 콜롬비아, 튀르키예 3국뿐이다.

아시아권에서도 한국보다 행복도가 낮은 나라는 태국(60위), 몽골(61위), 중국(64위), 베트남(65위), 인도(126위)뿐이다. 싱가포르(25위), UAE(26위), 대만(27위), 사우디아라비아(30위), 바레인(42위), 카자흐스탄(44위), 일본(47위), 우즈베키스탄(54위), 말레이시아(55위) 등이 모두 한국보다 높다. 북한은 여론조사를 할 수 없어 처음부터 명단에서 빠졌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올해도 핀란드이다. 1위를 6년째 고수하고 있다. 넉넉한 GDP 외에 모든 의료비가 공짜일 만큼 완벽한 복지제도, 상호신뢰, ‘워라벨’(일과 생활의 균형) 등 사회기반이 탄탄한 나라이다. 핀란드에 이어 덴마크, 아이슬란드, 이스라엘,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룩셈부르크, 뉴질랜드가 10위권을 형성했다.

행복한 나라 순위는 결코 부자 순위가 아니다. 세계 최대 부국인 미국 국민들이 스스로 매긴 행복점수는 6.9점으로 15위이다. 이웃 캐나다(13위)는 물론 아일랜드(14위), 호주(12위), 오스트리아(11위)에도 뒤졌다. 다른 전통 부국들도 별수 없다. 독일(16위), 영국(19위), 프랑스(21위), 스페인(32위), 이탈리아(33위), 일본(47위), 중국(64위), 러시아(70위) 등이 모두 상위권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불행한 나라 순위는 가난한 나라 순이다. 꼴찌(136위)는 오랜 내전 끝에 다시 탈레반 수중으로 떨어진 아프가니스탄이다. 역시 극심한 내전에 시달리는 레바논과 시에라 레오네, 짐바브웨, 콩고, 보츠와나, 말라위, 코모로스, 탄자니아, 잠비아 등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밑바닥 10위권을 메웠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보다 20단계 밑인 92위이다.

한국 행복 랭킹이 기대보다 낮아도 이해할만 하다. 넘치는 먹거리, 편리한 지하철, 신나는 K팝과 트롯 따위가 전부는 아니다. 김정은이 미사일을 쏴대며 겁주고 정치권은 진영싸움으로 날밤을 샌다. 내로남불, 음모선동, 부모찬스 풍조가 사회에 만연한다. 특히 결혼도, 자녀도 필요 없다는 젊은이들, 그래서 손자손녀를 볼 수 없게 될 노인들도 늘어난다. 대가 끊긴다는데 행복할 수 있겠나? 그건 나라도 아니다.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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