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오염과 경제 불황으로 점철된 미래 현실에 사는 주인공이 가상 현실 게임 공간에서 최강자로 성장하면서 슈퍼 재벌이 된다는 공상과학영화가 있었다.
사람들은 가상 현실 속 아바타로 만나서 대화하며 사랑하고 동료가 된다. 2018년 영화 ‘레디플레이어원’을 처음 볼 때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메타버스라는 말이 유행이 된 이후 다시 보았을 때는 곧 이루어질 미래를 그린 것만 같았다.
메타버스는 초월·가상을 뜻하는 메타(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합쳐진 말이다. 이미 1992년 소설 ‘스노 크래시’에서 아바타라는 용어와 함께 등장한 말이다. 요즘엔 스마트폰ㆍ컴퓨터ㆍ인터넷 등 디지털에 담긴 새로운 세상, 현실을 초월한 3차원의 가상 세계를 메타버스라 통칭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이제 가상 현실과 증강 현실로 만들어진 세계를 낯설어하지 않는다. 사회의 주축이 되어 가는 젊은이들은 이전 세대보다 어린 시절부터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 신기술과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바타로 이루어진 ‘부캐(또다른 캐릭터)’ 세상에도 익숙하기 때문인 듯하다.
낮에는 상사에게 질책받는 찌질한 인생일지라도 가상현실에선 큰 인기를 누리는 능력남일 수도 있고, 오프라인에서와 다른 외모와 성격의 자아로 살아갈 수도 있다.
가상현실 속에서는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거나 서열의 수직 상승도 가능하므로 심리적 대리 만족을 할 수 있다. 현실에서 느끼는 질투나 부러움을 상쇄하는 효과도 있다고 하겠다.
현실에선 고독한 삶에 지쳐 있는 사람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공간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또한, 인간관계의 보조 도구로 사람들의 감정 표출을 도와주고, 연결성을 강화해 준다는 장점도 가진다.
메타버스의 모습이 좀 더 현실에 가까워지고 몰입이 가능해진다면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그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인간의 삶을 새롭게 해석해 주는 메타버스라는 출입구가 열린 것이다.
메타버스를 이용한 삶에서는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 번째는 스포트라이트 효과다. 사람들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더라도 인공지능(AI)의 알고리즘이 나를 기쁘게 해주기에 마치 연극 무대의 단독 조명을 받는 것처럼 착각하는 현상이다. 내가 보여주는 것을 사람들이 다 볼 것이라 생각한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서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원하는 만큼 보여줄 수 있고, 내가 느끼는 것을 남들도 나만큼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는 자기중심성이 강화된다. 이메일을 보낼 때는 나의 의도를 상대방이 다 알거라 생각하지만, 실제 메일을 받는 사람들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사람은 절반도 안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두 번째, 초점 착각을 조심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SNS)에서는 어차피 예쁘거나 좋은 것만 골라서 보여주는 것일 텐데, 자꾸 보다 보면 타인의 행복을 과대 평가하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실제 페이스북 이용 빈도가 높은 사람은 삶의 만족도가 더 떨어진다는 미국 미시건대학 연구도 있으니 말이다.
세 번째로 가상현실의 세상에서는 선정성이나 폭력성에 둔감해진다. 죽음과 폭력이 가상이라 믿다 보니 자극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이다. 베버 법칙에서처럼 이젠 왠만한 자극에는 재미를 느끼거나 놀라지 않는다.
또한, 메타버스와 가상현실에 대한 의존 현상도 생길 수 있다. 외롭고 무시당하는 오프라인 사회를 떠나 보다 대접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가상 세계에 머무르는 걸 선택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이버 왕따 현상’이다. 학교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메타버스에 기본적으로 내재한 익명성과 비대면성 때문에 더 과감하고 잔인해지곤 한다. 심한 경우엔 메타버스와 현실을 혼동하는 ‘메타버스 정신증’도 생길 수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라 하더라도 헤드셋을 내려놓거나 전기가 끊어진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메타버스건 오프라인이건 우리 인생은 내가 서 있는 이 현실에서 시작한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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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익 의학전문기자>